브런치북 길 2 28화

평화의 종을 치며

by 최연수

38선을 지나자 안개가 걷히면서 차창 밖으로 드러난 가을 絶景(절경)에 버스 안은 歎聲(탄성)으로 가득하다. 해마다 UN day 무렵이면 단풍이 절정에 이르기는 하지만, 아마도 한 주 전, 한 주 후라면 이렇게 아름답게 수놓을 있겠느냐며, 異口同聲(이구동성) 가장 적절한 시기의 야유회라고 흐뭇해한다. 짙푸른 하늘이 선녀가 되어 강물에 사뿐 내려와 목욕을 하여, 둘러 싼 산들이 초록 자락으로 이를 가려주려 하지만, 우리는 나무꾼이 되어 선녀의 羽衣(우의)를 감추며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빨랫줄에 널린 붉은 치마에 소름이 끼치고, 꽃밭에 핀 빨간 꽃에 머리털이 쭈뼛했는데, 지금은 선홍빛 단풍이 불타지 않는 걸 이렇게 아쉬워하고 있구나. 65년 세월이 약이 되어 적색 알레르기가 어느새 완치되었나보다.


굽어보이는 파로호는 입을 굳게 닫아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기억의 창고는 빗장을 풀어 뼈아픈 역사를 들추어 낸다. 광복 전 화천댐 공사로 생긴 인공호수로서, 6.25 전쟁 전에는 이북 땅이었다. 개성을 내어주더라도 이곳은 사수하라는 지시에 따라, 그야말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하천처럼 흘렀다는 屍山血河(시산혈하)의 격전지가 아니던가? 人海戰術(인해전술)로 덤벼드는 중공군을 大(대파)하고, 엄청난 捕(포로)를 생포했음을 기리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破虜湖(파로호)’로 명명했다는 곳. 지금은 잔잔한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운 姜太公(강태공)들이 세월을 낚고 있구나. 모처럼 소풍이라면 나도 저들처럼 모든 잡념일랑 다 날려보내야 할 쉼과 고침의 힐링이어야 하거늘, 넓은 초원에서 난 왜 마른 풀을 뜯어먹고 있나? 65년 동안 깎이고 닳아 꽤 반들반들해진 감정이라고 자처했는데... 6.25를 뼈저리게 겪은 세대인데다가, 안보불감증에 걸린 우리의 현실이 너무 안타까운 때문일 것이다.

아흔아홉 구빗길을 돌아 드디어 ‘세계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길이 601m, 높이 125m의 콘크리트 벽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우리를 반가이 맞이한다기보다는, 그 偉容(위용)에 눌려 온몸이 굼벵이처럼 오히려 오그라들었다. 5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북한의 금강산댐(임남댐)의 水攻(수공)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부는 침이 마르도록 홍보했으나, 일부 국민들은 公安(공안) 정국을 위한 꼼수라며 귀를 막고 극렬하게 聲討(성토)를 하였다. 결국 600억 원 국민 성금으로 착공하여, 우여곡절 끝에 총 3995억 원을 들여 2단계 공사를 거치면서 2005년에 완공했다. 최대 저수량이 26억 3천만 t이라니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세계평화의 종 공원’에서 굽어보는 호수는 호수라기 보다는 대야의 세숫물 같다. 홍수 조절은 물론 과연 북한의 수공을 끄떡 없이 막아낼 것 같다. 핵과 미사일을 꾸준히 개발하면서, 전쟁의 협박을 일삼는 요즘 북한의 作態(작태)로 보아, 有備無患(유비무환)의 대역사였음을 지금 의심할 수 있으랴. 세계평화의 종! 세계 각처의 분쟁 지역에서 수집된 탄피로 주조되었다니 의미가 깊다. 에밀레종을 닮은 9999관의 육중한 종 앞에 섰다. 500원을 내면 한 번 칠 수 있단다. 나도 한몫 끼어 10 명이 한 조가 되어 힘차게 쳤다. 평화통일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두웅-”

....미친 바람아

영원히 사라져라.

조국아 재생하라.

평화의 종아 울려라....

65년 전 붉은 북풍에 쫓겨, 어둠으로 온몸을 감싸며 피난 길에 올랐다. 까까머리 소년은 어디론지 흘러가는 流星(유성)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두근거린 가슴에다 시를 썼다. 습작이지만 평화의 종아 울리라며 하늘을 향해 읊조리지 않았던가? 지금 이 순간도 그 때의 간절함을 되새기며 종을 친다.

종소리는 평화의 비둘기로 변하여 저 휴전선을 넘어 북녘 땅으로 날아갈까? 하지만 이 평화의 전령사들을 반기는커녕 닥치는대로 잡아 죽이리라.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이 종을 향해 그들은 저주의 포격을 하고 싶을 것이다. 탈북민 단체들이 띄워보내는 대북 전단 풍선을 향해 총격을 한 것 처럼.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의 동판이 악수의 손을 내밀며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물론 우리나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러나 그의 햇빛 정책이 빛 바랜 가운데, 지금도 12Km 전방 휴전선에서는 一觸卽發(일촉즉발)의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평화상은 다른 부문과는 달리 수상자의 업적이 빛날수록 그 이면에는 어두운 반평화적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지 않은가? 한쪽에는 작지만 또다른 ‘노벨평화의 종’이 메달려 있다. 온통 평화 평화 평화다. 그러나 전쟁과 내란과 테러의 기사가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평화는 인류의 염원일뿐 영원히 풀리지 않은 숙제일 것 같다. 성경도 말세의 징조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마24:7, 막13:8, 눅21:10)라고 비관적이다.

‘비목공원’ 언덕으로 내려갔다. 돌무덤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화강암의 비목탑이 우뚝 서있는데 적막이 이를 휘감고 있다. 돌 무더기에 세워진 앙상한 십자가! 그 위의 구멍 뚫린 녹슨 철모!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碑木’의 현장은 좀더 북쪽 비무장지대라 하지만, 흩어져 있는 이 돌 무덤들은 하늘을 향해 무얼 泣訴(읍소)하고 있을까?

‘비목’ 시비 앞에 섰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피지 못한 채 꽃잎처럼 져버린 무명 용사들을 생각하며 애틋한 목소리로 자주 불렀던 노래! 이제 몸은 늙고 목청은 낡아 입속으로만 불러보는데 자꾸만 콧날이 시큰거린다. 우리가 이렇게 초연이 걷힌 아름 다운 대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를 온 몸으로 들이마시고 있는 것은, 그들이 흘린 고귀한 피의 대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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