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멧새 1 14화

사진첩

by 최연수

겉장은

파아란 잔디밭.

두 송이 꽃이

누워 있었던지,

자국만

나란히 남았습니다.

검정 책장을

따라붙는 미농지.

그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희부연

안개가 끼었습니다.

새까만

켄트지 끝장까지,

풀 자국이

희끗희끗한 걸 보면,

사진은 많이

붙었던가 봅니다.

겉장은

보드라운 풀밭.

흰 구름

양치던 피리 소리만,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겨울 방학을 맞아 하향(下鄕) 하자마자 혼담은 다시 수면 위로 부상(浮上)했다. 고시 공부를 하는데 내조(內助)를 해 줄 수 있는 적격(適格)이요, 적기(適期)라는 것이다. 그는 나와 생년월일이 같으므로 궁합(宮合)도 최상(最上)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도 있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간 나무는 없다’ 했던가?

심사숙고(深思熟考)를 하면서, 점점 혼담에 귀를 기울여지는 나를 의식했다. 20여 년 동안 잠자던 이성(異性)에 관한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도 결혼할 수 있는 성숙(成熟)한 남성이구나!

‘연애강좌’ ‘완전한 남성’ ‘성교육독본’ 등속의 책을 읽었다.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 했던가? 하이네․빠이론․릴케 등 연애시를 읽었다. 나도 ‘금잔디’ ‘난 목동 되어’ 등 정형시(定型詩)를 지어 작곡(作曲)도 했다. 약혼만 해두고, 고시를 본 후 가을에나 혼례를 올리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처녀 측 환경은 즉시 결혼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없던 일로 일단락(一段落) 되어, 나는 개학과 동시에 상경했다. 그러나 한동안 이 문제는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결혼하자면서 조건을 달고, 결혼을 단념한다면서 야릇한 연정(戀情)은 더 짙어지고...내 자신을 히말라야의 설인(雪人)이라 했다.

그가 봄에 약혼하였으므로, 모든 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막을 내렸다. 그야말로 시원섭섭했다.

추억의 album이라 한다. 표지는 초록색 우단(羽緞)으로 화려하지만, 검정 켄트지(Kent紙)에 사진은 없고, 사진 붙었던 접착제(接着劑) 자국만 남아 있다. 넘기면 안개처럼 희부연 간지(間紙) 미농지(美濃紙)만 켄트지에 얼른 따라 붙는다. 그 동안 이렇게 안개 속을 거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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