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센 가지 속에서
피어난 꽃송인데,
그다지도 숨결은 부드러워
그윽한 향기가 되었는가?
곱디고운 그 꽃물을
머금고만 있더니,
분수처럼 힘차게
터뜨렸는가?
우중충한 우리 집이
환해진 것은,
마당 가득히 장미가
핀 탓인가?
국민학교 시절 때만 해도, 누나라 부르지 않고 이름(孟心)을 불렀다. 어렸을 적에는 싸움도 많이 했다. 그런데 누나가 고향을 떠나 광주여중에 입학하고, 나는 집에 남아 재수(再修)를 했다. 이 때 처음 누나라 부르는데 얼마나 어색했는지...이듬해 나도 또한 광주에 올라가 중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다시 만났다. 누나는 기숙사(寄宿舍), 나는 하숙집에 따로 떨어져 일요일마다 만나, 외로움을 달래었다. 누나가 중3, 내가 중2가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6.25 동란이 일어났다. 우리 3남매는 할아버지 댁에서 3개월 남짓 은신해 있었다. 수복(收復)이 되고 복학하면서 다시 자취(自炊)를 하였다. 누나는 온갖 고난을 감수(甘受)하면서, 엄마처럼 나를 감싸주었다. 가정 형편으로 중학 졸업과 동시에 누나는 낙향(落鄕)하고, 나는 혼자 남아 고학(苦學)과 자취생활을 계속하였다. 방학이 되어야 누나와 재회(再會)하는데, 누나는 어엿한 처녀로 나를 맞았다.
남의 셋집이었지만, 마당에는 꽃이 피어있었다. 누나는 장미를 좋아한다고 했다. 원만(圓滿)한 성격과 내성적(內省的)인 기질(氣質), 그리고 소박(素朴)한 차림새로 보아 백합(百合)꽃이 누나의 이미지(image)와 어울렸는데, 누나는 정열적(情熱的)인 빛깔과, 가시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 장미(薔薇)의 의지(意志)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때 ‘장미’를 썼다.
누나는 결혼하고, 1963년 6월 27일, 쌍둥이를 출산한 후 속절없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1933년 4월 30일(음 4.6)생이니까 만 30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지금도 장미를 보면 누나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