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도, 잘 알고 싸우자!
얼마 전에 우리 팀에 합류한 새로운 사회복지사 동료에게 물었다.
임신 34주 차인 내 동료는 늘 싱글벙글 천사 같은 미소를 하는 인도 여자다.
지금 남편은 초등학교 때 만나서 결혼 기간은 짧아도 서로를 안 지가 무려 20년이 넘는다고 한다.
정말로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결혼 18년 차인 나는 여전히 자주 부부 싸움을 한다.
주로 삐지는 것은 나다. 아내는 늘 그런 나를 보며 "제발 마음이 넓은 남편이 되었으면 좋겠어"한다.
최근에 '눈물의 여왕'에 심취하더니, 툭하고 말을 던진다.
"역시 드라마 속에 멋진 남편은 존재하지 않아!"
순간 버럭하며 한 마디 했다.
"백현우도 이혼하려고 했거든!"
최근에 최다은 작가님의 [사랑하는 나의 가정] 브런치 북을 읽게 되었다. 최다은 님은 '부부는 같이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라고 말한다.
"싸움닭인 아내와 감정조절이 힘든 남편이 함께 맞추어 간다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시며 본인과 자신의 남편의 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18년 차 부부인 우리는 싸움닭이고 감정조절이 힘든 남편과 돌부처 아내라고 할 수 있겠다.
https://brunch.co.kr/@dana1213/311
최다은 님의 최근 글 [싸움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거잖아]를 보며 한편으로 위안이 된다.
아직도 우리 부부 사이에는 사랑이 너무 많은가 보다. 툭하면 싸우니 말이다.
우리 부부는 갈등폭발유형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내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다. 여전히 아내가 사랑스럽고 좋다.
안타깝게도 결혼 부부 10명 중 9명은 늘 부부싸움을 한다. 사랑이 없으면 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싸우느냐다.
사실 가정 폭력 사건을 다룰 때마다 늘 내 마음 한쪽에 찔림이 있다.
특히나 아내와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날 출근했을 때는 악마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한다.
"야, 어젯밤에 너 아내랑 크게 싸웠지? 그거 가정 폭력 아니야?"
"..."
"도대체 어디까지가 부부 싸움이고, 어디부터 가정 폭력이라고 생각해?"
다시 내 동료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뉴질랜드에서는 가정 폭력을 아주 심각하게 본다.
내가 보기에는 일반적인 부부 싸움 같아 보이는 것도, 가정 폭력으로 간주할 때가 있다.
어떤 부부싸움이 그냥 싸움이고, 어떤 부부싸움이 폭력일까?
어떤 부부싸움이 여전히 사랑해서 싸우는 싸움이고,
어떤 부부싸움이 용납될 수 없는 폭력일까?
한 번은 어떤 백인 여성 환자가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대략 20대 후반 정도 되는 여성이었다.
진료를 받던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이 가정 폭력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털어놨다.
곧바로 나에게 연락이 왔다. "가정 폭력 환자입니다. 상담을 진행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사회복지사 굿네이버입니다".
첫인사를 건네는 찰나에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했다.
다행히 멍자국도 없는 것 같고, 딱히 폭력의 흔적은 안 보였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최근 가정 폭력을 경험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제게 상황을 나누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젯밤에 제 파트너와 싸웠습니다". 짧게 그녀가 대답한다.
"혹시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목을 조르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도 저를 때린 적은 없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신체적인 폭력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요? 어제 상황을 좀 자세히 말해 주시겠어요?"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제 돈 문제로 조금 싸웠습니다.
그런데 제 파트너가 저를 계속 깎아내렸습니다"
"평소에도 저를 '못난 X, 'XX 같은 X '돼지'라고 부릅니다".
(너무 비속어를 여과 없이 적은 것 같아 수정했습니다)
솔직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가정폭력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환자에 대한 내용을 내 동료에게 말해주고 물었다.
"너는 이게 가정 폭력이라고 생각하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가정 폭력이지!"
가정 폭력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일명 권력과 통제 바퀴 (Power and Control Wheel)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부터 보면 (시계 방향)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예: "돼지" "미친 X" "구제불능" 등등의 말들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임 감정 갖게 하기
예: "당신 같은 사람은 안돼!" "넌 구제불능이야" "너하고 이야기하느니 차라리 벽 보고 이야기하지" 등
상대방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말을 지속적으로 함
-상대방 이름 부르기
-상대방이 자신이 정상이 아닌 사람처럼 생각하게 함
"넌 정상이 아니야" "정신이 나간 거 아냐?" 등의 말을 함
-주도권 싸움하기 (Playing mind game)
예: 다른 사람이 먼저 사과하게 만들기, "네가 사과할 때까지 절대 화 안 풀지"
카톡 메시지 바로 답장 안 하기 (일부러 지연시킴)
장시간 (며칠 동안) 상대방 전화 안 받기
-상대방 모욕주기
- 상대방 죄책감 느끼게 하기
예: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너 때문에 싸우게 된 거야!" 등 모든 잘못을 상대에게 떠넘김
-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와 대화하는지 등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고 함
특히 한국은 여전히 가부장적이라서 아버지(가장/남편)가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쉽게 이런 행동을 용납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상대방의 문자/카톡메시지를 일일이 체크함
-상대의 외부 활동을 제한함
- 질투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함
"내가 괜히 그래?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신체적 학대를 포함한 모든 학대를 부정한다.
행여 상대방이 '이건 폭력이야'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남들도 다 그렇게 싸워" "당신만 유별나게 굴지 마" 식으로 무시를 한다.
"때리지 않았잖아? 그런데 무슨 가정 폭력이야?"는 식으로 신체적 폭력이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 원인을 상대방 (특히 여상)에게 돌린다.
- 상대(아내)로 하여금 자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기
"네가 이렇게 사니까 애들이 이 모양이지!' "너 닮아서 애들 성격이 다 거지 같지!"
- 자녀가 대신해서 상대방의 말을 전하게 함
"야, 너희 엄마한테 가서 말해,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만 안 둔다고!"
"야, 너희 엄마한테 가서 말해, 아빠 건들지 말라고!"
-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다고 협박하거나 아이를 보지 못하게 막음.
특히나 한국 문화에서는 남자라는 특권이 쉽게 허용되는 분위기이다.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특권을 누린다.
- 상대(특히 아내)를 마치 종 부리듯 함
“가서 밥 차려” “물 좀 떠와” “옷 좀 미리미리 다려놔야지!” 등 가사의 모든 일을 다 아내에게 부여한다.
단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뿐만 아니라,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도 해당이 된다.
특히나 한국 문화에서는 며느리에게 온갖 집안일을 시키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정상적인 가족 관계라고 볼 수 없다.
- 모든 큰 결정을 (상의 없이) 다 함
부부는 동등한 관계이다. 어떤 일이든 함께 상의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하지만 비정성적인 관계에서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모든 힘을 갖고 있다.
남편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못한다든지,
남편의 말이 곧 ‘법’이 된다면 폭력을 휘 뒤르는 것이다.
- 상대(아내)가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게 제한을 한다.
- 상대가 돈을 구걸하게 만듦
경제권을 오로지 남편이 가지고 있어서, 아내가 매달 주는 생활비 외에는 사용할 돈이 없음
- 상대가 현재 얼마의 돈이 계좌에 있는지를 알지 못함
지금이야 많이 문화가 바뀌었지만, 한 때 모든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건강한 부부는 모든 경제권을 동일하게 가질 권리가 있다.
이것은 부부가 맞벌이를 하느냐 아니냐 와는 상관이 없다.
나의 경우, 적은 금액 정도는 아내와 상의 없이 쓰지만,
어느 이상의 금액이 든다면 반드시 아내와 상의를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 "한번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어휴, 한 주먹도 안 되는 것이?"는 말을 하며 위협을 한다.
- 때리는 시늉을 하고 손을 올리며 위협을 한다.
- "확! 죽어 버릴 거야!" 하며 자살 혹은 자해하겠다고 협박을 한다.
- 현재 자신의 상태(건강/정신 등)를 전하며 상대를 불안하게 한다.
- 접근급지 명령 등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 지속적으로 해제할 것을 강요한다.
- 불법적인 일을 강요한다.
- 상당히 위협적인 행동, 표정, 제스처로 상대(아내)를 두려워하게 한다.
-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집안 기구들을 부숴버린다.
- 동물을 학대한다.
- 칼 등 위협적인 도구를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부부 10명 중에 9명은 싸운다. 흔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한다. 또 "싸워야 정이 든다"라는 말도 있다. 부부는 절대로 일심동체가 될 수 없다. 수십 년을 따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느 날 결혼을 통해 피부를 맞대고 살아간다.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데, 어찌 싸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사랑하니까 싸운다. 마음도 없으면 관심도 없다.
하지만 싸워도, 잘 알고 싸우면 좋겠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차분한 대화 속에서 문제들을 풀어갈 때, 부부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건강한) 부부 싸움은 서로를 하나 되게 하지만,
맞부딪치는 것은 서로를 갈라지게 만든다.
"Marriage fights are the fusion of two,
but clashing is the separation of two."
- Addison H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