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삶을 속일지라도

by 희도

내가 삶을 속일지라도



토방서 고무신 터는 손에 한숨을 싣는 할머니

- 장마가 짤네! 비 끝이 짤브믄 가뭄이 진디

- 뭘 비 안 온 게 좋구만

- 그냐? 이라가도 벨안간 쏘나기 온게 잘 바라 잉


장마가 짧으면 가뭄 든다는데

현관에서 발 더듬어 하늘 보는 내 말에

비 안 온 게 좋은데?

건너오는 말에 몇 숨을 삼킨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내가 보인다

뿌연 안개처럼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흐리다

뜨거운 태양을 비웃듯 갑작스러운 소나기

참았다가 터져오는 울음 같다


먹먹하고 숨이 막혔다, 뜨거운 여름 오후

후덥지근한 바람이 도는 공기 속으로

비는 예고도 없이 마른 땅을 두드렸다

빨래를 들고 마루 끝에 앉으면

기와 위로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새살스럽던 제비 가족도 부산스럽던 강아지네도 턱을 괸다

담벼락 안 조그만 세상이 흠집 하나 없는

무결한 빗소리에 잠기면 뒤안 툇마루가 또옥, 똑 운다

처마 타고 흐르는 빗줄기는 고요하게 서늘하다

문득문득 뺨을 만지는 바람만 애처롭게 머물다 간다

나뭇가지를 헤집고 부들 떠는 잎들 사이를 잔인하게 스미는 빗방울

서둘러 숨으러 가는 빨간 앵두, 코끝이 찡해졌다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그리운 태양

한껏 거만한 순간인 저녁해가 질 무렵

석양의 잔조로 붉어진 싸늘함 앞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따스한 봄날 서늘한 피안화(彼岸化) 같았다


벤 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그 어느 여름날

한 날이 기척도 없이 겹쳐 들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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