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칠레 워킹홀리데이
[Ep.4] 흔들리는 건물 속에서 내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어제 와인을 너무 마셔서 술이 덜 깬 까닭인지, 매일 5시 30분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출근을 해서 그런지,
일어나서 씻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많이 허약해졌네…….” 라며 혼자 씁쓸하게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이 새벽부터
하나둘씩 거실로 튀어나왔다.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났냐고 물었더니 지진이란다. 알고 보니 내 체력이 약해서 다리가 후 들리고 있는 것도, 어제 와인을 많이 마셔서 숙취 때문도 아니라 진짜로 땅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여행자들과 워홀러들 사이에서 사장님은 아침을 준비하시며 태연하게 ‘괜찮다’고 말씀해주셨다.
게스트하우스 건물은 창문을 열면 옆 건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서 창문 넘어 반대편 칠레 사람들을 봤더니 지진이 난 걸 알기나 하는지 세상 태평해 보였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 여쭤보니 이 건물이 100년이 다 되어간단다. 칠레는 오래된 건물일수록 내진설계가 안전하게 되어 있다는 게 증명되는 것이고 칠레의 내진 공법은 세계 최고니 안심해도 된다고 하셨다.
이후에도 여러 번 지진을 경험했는데 나중엔 건물이 흔들리거나 찻장의 컵들이 요동 쳐도 그러려니 했다.
나도 이제 뭐랄까 ‘ 또 땅이 배탈이 났나’ 생각하는 정도.
지진 말고도 칠레에 살다 보니 익숙해진 것들이 있다.
바로 치안이다.
출근을 하기 위해서 집으로 나와 역으로 가는 길에 조금 좁아지는 길목이 하나 있다. 어느 날과 같이 출근하려고 걸어가는데 좁은 길목에 다다르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추고, 차도로 나갔다가 지나쳐 갈지, 좁은 길목이 끝 날 때까지 앞에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빠르게 지나치기로 결심하고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뛰려는 순간,
내 손 말고 따뜻한 타인의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서 '악' 소리를 지르며 옆을 쳐다보았더니 같이 놀란 10대쯤 되어 보이는 소매치기범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그 소매치기범들이 어리숙하다고 생각되는 게,
내가 놀라서 쳐보니깐 ‘disculpa 미안하다며’ 앞에 길을 막던 무리와 함께 사과하면서 도망갔다.
나는 이 경험을 마지막으로 칠레 워킹홀리데이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칠레를 거주하면서 다른 워홀러가 폭행 강도를 만나 핸드폰을 뺏았기거나,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와중에 총기 강도를 만나 여권부터 짐 전체를 뺏겨 다시 돌아오거나, 흉기를 든 괴한을 만나 지갑을 빼앗겼는데, 지갑에 만족할 만한 돈이 없자 흉기에 찔린 일도 보았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칠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이 생겼다. 예를 들어해야만 하는 행동들은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을 탔을 때 가방을 꼭 앞으로 매어야 하는 것,
강도를 만났을 때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목숨 값으로 최소 5만 페소(9만 원) 정도를 넣고 다녀야 하는 것,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간에 이동할 일이 생긴다면 꼭 우버(택시)를 이용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은 늦은 시간 걸어 다니면 안 된다는 것,
길거리에서 핸드폰을 장시간 꺼내면 안 된다는 것(특히 아이폰), 이어폰을 끼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소지품을 놓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관광객처럼 다니면 안 된다는 것,
혹시 괴한을 만나더라도 괴한과 맞서 싸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우리나라에서 이어폰을 끼고, 밤늦게 돌아다니던 당연한 일상들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며 우리나라 치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