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칠레 워킹홀리데이
회사에 입사한 지 어느덧 10개월이 지났다.
회사 내부 문제 때문에 서비스 론칭을 못 한 상태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던 날짜가 가까워졌다. 10개월 동안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렸던 유의미한 ‘성과’는 그것이 아니라는 걸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성과의 시발점은 분명 서비스 론칭이었다. 론칭 이후에 ‘칠레’라는 필드에서 유의미한 ‘경험’을 하는 것이 부모님과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론칭이 무기한으로 미루어지면서 내가 해야 할 일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본사에 있는 이사님과 연락을 매일 주고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일을 받은 지는 시간이 꽤 흘렀다. 약 10개월 동안 서비스 론칭만을 준비했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보면 론칭 이후의 필요 자원이었던 나는 회사에게 계속 필요없는 자원인 셈이었다. 이렇게 회사에서 나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품던 중에 결정적으로 앞서 말했던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나에게 늘 스트레스를 줬던 ‘그분’께서 고문 격으로 회사와 같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공식적으로 ‘같이’ 일하게 됐으니 출근을 자기 사무실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업무용 책상은 따로 없지만, 접객용으로 쓰이던 큰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업무를 보면 된다고 했다. 당연히 회사를 믿고, 대표님을 믿기 때문에 이 분이 회사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이 들어옴으로써 개인 사무실에서 접객용 테이블로 밀려나듯, 나의 역할이 더욱더 작아지는 건 분명했다.
점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과 내가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자설명회를 가도 팀원으로 되어있는 나는 학부 졸업도 못 한 상태로 한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랫동안 칠레에 머무른 경험이 있는 현지 전문가도 아니었다. 칠레 필드플레이어 역할로 있던 나를 보고 심사역들은 그 부분을 캐물었다. 그리고 나 또한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나와 부모님께 했던 약속을 지킬만한 성과를 보여줄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 시기에 아버지의 은퇴도 겹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실패를 인정했다.
“대표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한국에 계신 대표님께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유를 물어보시던 대표님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알겠다며 내가 대학을 졸업 후 다시 올 수 있도록 회사를 많이 키워 놓고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단기 알바를 할 때도 합격하는 것보다 그만두는 게 가장 힘들었는데, 약 1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한 대표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자니 너무 죄송스러웠다. 대표님께 연락을 마친 후, 회사 팀원분들 한 분 한 분께도 감사 연락을 드렸다.
그렇게 조금은 허무하게 약 1년간 스타트업 근무가 끝이 났다.
“어찌 됐건 이 시작의 마침표는 세계일주로 찍혀 있을 것 같다.”
1년 전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출발하기 전 일기장에 썼던 글이다. 퇴사를 하고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떤 일이 지나갔는지 일기장을 돌이켜보다 나의 처음 목표였던 세계일주를 발견했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가야할 곳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발검음을 옮겨야 하는 곳은 세계였다.
칠레에서 한국으로, 조금은 길게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약 한 달 동안 그렇게 세계일주 준비를 했다. 생활비 이외엔 모두 저금하던 돈들이 모여 어느새 목돈이 되어있었고 세계일주를 가기에 충분한 돈이 되었다. 내가 가진 예산으로 각 나라별, 도시별 체류기간을 설정하고 계획을 짰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미리 끊어야 하는 비행기 표도 끊었다.
여행 준비를 마치고, 주변정리를 하면서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만났던 모든 분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1년이 좀 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속에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워킹홀리데이 덕분에 칠레에서 만난 기영이 형과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몸 조심히 다녀오고 여행경비에 보태 쓰라며 나의 손에 용돈도 쥐어주셨다. 칠레 친구들에겐 이제까지 고마웠다고, 다시 꼭 칠레에 돌아오겠노라고 공수표를 날렸다. 그들 역시 자기가 한국에 가겠다며 한국에서 보자며 공수표로 화답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에게서 감사한 응원을 들으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좋은 인연을 남기고 가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칠레에 있던 시간 동안 남긴 것이 ‘성과’가 아닌 ‘감사한 인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정리를 모두 끝내고 칠레에 남은 감사한 인연들과의 인사도 마쳤다. 집에 홀로 남아 세계일주의 첫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티켓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분명 지금 떠나면 이제 앞으로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칠레라는 것을 직감으로도, 머리로도 잘 알고 있었다. 24살의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던, 오지 않았더라면 얻지 못 할 많은 기회들을 주었던 칠레를 떠난다니 섭섭한 감정이 일었다. 그래서 칠레에 꼭 다시 오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4년전 일기장 글 처럼,
세계일주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3년전 일기장 글 처럼
다시 한번 내 일기장에
'칠레에, 남미에 꼭 돌아오겠다'고 남겼다.
그렇게 조금은 덤덤하게 칠레와 작별인사도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5월 28일, 여러 사람들의 감사한 응원 속에 나는 세계일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