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칠레 워킹홀리데이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한국 돌아가,
니 대표한테 전화해서 너 자르라고 해야겠다”
놀랍게도 칠레에 있으면서 만난 어느 한국분에게 들은 말이다. 이외에도 모욕적인 발언과 선 넘는 언행을 서슴지 않던 분이 있었다. 혹자는 세상에는 꼰대와 어른 이렇게 두 가지 어른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기준에 의하면 죄송하지만 이 분은 전자에 가까웠다.
칠레에 돌아와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 칠레에 계시는 한국분들과 컨택할 일이 많아졌다. 법인 설립부터 계좌, 숙소 문제 모든 것이 외국인이 처리하는 것보다 한국분들께서 처리해주시면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컨택하는분들 중 관련 자문을 주시는 한 대표님이 매번 업무시간에 나를 불러서 술을 사 오라고 시켰다. 뿐만 아니라 술자리를 같이 해야만 했다. 그분은 얼마나 술을 자주 드시는지 키는 작지만 통통한 체형에 언제나 코 끝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친가 외가 가족 중에서 내가 막내기도 하고, 평소에 어른들한테 잘한다고 들어왔던 나이기에 처음 불려 간 술자리에서 대표님의 인생사를 들으며 사회생활 전용 ‘리액션’과 함께 최대한 맞춰드렸다. 대표님께서도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드셨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이따금 부르셨고 나중엔 자신이 술을 마시고 있으니 아는 사람 소개 겸, 술이 떨어졌다고 같이 마실 겸 사 오라고 시키셨다.
그런데 이런 술자리가 일주일에 한 번에서 세 번으로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표님은 술만 마시기 시작하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사를 들려주시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술자리는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어르신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인생 경험과 노하우를 말씀해주시는 게 감사했다. 하지만 술자리가 거듭 될수록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됐고 같은 레퍼토리로 본인 이야기가 끝나면 미국의 유명 대학을 합격한 자식이 갭이어(미국의 입학 전 휴학제도)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입학할 것이라며 너무 기특하다며 자식 자랑으로 이어지셨다. (반복학습은 위대하다 5년이 지나도 안 까먹고 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사회는 원래 쓰다는데 이런 술자리도 못 버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술자리에서 나에게 스페인어 즉흥 테스트를 시키시던가, 24살 밖에 안 되는 네가 여기서 뭘 하겠냐는 듯한 어조로 나를 무시하시는 듯한 발언에 점점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느 날 어김없이 또 불려 나가서 술을 먹다 평소보단 길어지는 술자리에 처음으로 나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온 줄 알고 있던 대표님께 학교는 사실 휴학한 상태고 워킹홀리데이로 왔다가 워킹비자로 전환 한 것이라 말씀드렸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표님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한국 돌아가,
니 대표한테 전화해서 너 자르라고 해야겠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렇게 말씀하셨다.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고, 선을 넘는 기준이 남들보다 관대하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이 말을 듣고 처음으로 화가 났다. 평소 내 업무시간에 나를 불러 술을 마시게 한 것도 나의 일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겠구나 싶었다. 평소 내 신념에 대해 고집이 강한 나이기에 회사와 나의 경험을 무시하는 발언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이를 꽉 물고 대답했다.
“아드님이 대학교를 입학하기 전 갭이어를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처럼 저 또한 졸업하기 전에 휴학을 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고 있는 겁니다. 덕분에 칠레에서 대표님 같은 분을 만나 이렇게 좋은 이야기 듣고 있어서 저는 너무 좋은 경험이 되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억지로 웃느라 눈은 웃지 않았다.
아드님 이야기를 같이 해서 할 말이 없던 건지 그분도 더 이상 첨언하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 술자리에 돌아와서 며칠 동안 화를 식혔다. 그 뒤로 술 마시러 오라는 연락에 업무 일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에둘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업무로 둘러대는 건 한계가 분명했다. 마침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가졌던 술자리에 체중도 10kg이 늘어 체력도 많이 약해졌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시기라 술을 잠시 끊기로 다짐했다.
그 다음 주에 회사 대표님께서 칠레로 오셔서 대표님께‘제가 칠레 필드 플레이어로 입사하게 됐는데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체력이 많이 약해졌다. 시장에서 바로바로 뛰면서 느껴야 하는 역할인 제가 체력이 너무 약해져서 운동 좀 하면서 당분간은 금주하겠다’ 말씀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그분이었다. 회사 대표님과 나와 함께 법인 설립 이야기를 하는데 술 한 잔을 하자고 하셨다. 음식점에 가서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술잔에 내 차례가 오자, 술을 끊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술 끊는 게 제일 멍청한 거다. 술 끊고 다른 애들보다 더 잘할 자신 없으면 그냥 마셔라”라며 술을 권유했다.
곤란한 상황에 나는 어쩌면 대표님이 막아주시기 않을까 하고 대표님을 쳐다보았지만 대표님도 어쩔 수 없다는 눈빛에 결국 나의 잔은 다시 채워지고 말았다. 차오르는 것이 대표님에 대한 섭섭함인지 그분에 대한 분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입안에 털어 넣던 술맛의 씁쓸함은 꽤 오랫동안 입에 맴돌았다.
씁쓸한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법인 설립만 완료되면 더 이상 이런 스트레스도 없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참자’ 다짐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법인 설립이 끝날 때쯤 더 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나한테 그토록 스트레스를 주시던 그분께서 우리 회사 고문 격으로,
아니 내 칠레 사수 격으로 회사 합류 결정이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