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웅덩이 아래, 당신이 띄운 잠수함
어떤 슬픔은 종이 한 장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상담실 바닥에 A4 용지가 끝도 없이 이어지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어린 자녀를 홀로 키우던 서른 초반의 어머니는 ‘웅덩이’를 그려보자는 제 제안에 도화지 한 장으론 부족하다며 종이를 계속 이어 붙이셨지요.
상담실 바닥을 가득 메우며 뻗어 나간 그 어두운 선들은, 흡사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 같았습니다.
"선생님, 너무 깊어서 밧줄도 중간에 끊겨있어요. 차라리 나갈 수 없다 생각하면 편안한데, 동시에 끝없이 떨어지는 게 너무 무서워요."
덤덤해서 더 서늘한 고백 앞에 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깊이는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 가정에 드리운 무관심의 깊이와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선명한 건, 그 절망의 바닥에서 보여준 어떤 '반전' 때문입니다. 칠흑 같은 공포를 마주한 순간,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무방비 상태의 자신에게 스노클링 장비를 씌우고 날개까지 달아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치 혼자가 아니라는 듯, 언제든 쉴 수 있는 든든한 잠수함 한 대를 곁에 그려 넣으셨고요. 그 순간, 바닥에 주저앉아 웅덩이를 그리며 한없이 작아 보이던 어머니는, 어느새 저 든든한 잠수함에 올라타 깊은 심해를 유영할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의지만으로 까마득한 웅덩이에서 헤엄쳐 나오기엔, 현실이라는 수면이 너무 높고 멀게만 느껴집니다.
최근 심리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Project AIM)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자폐 아동에게 정말 필요한 건 무조건 많은 치료 시간이 아니라, 발달 단계에 맞춘 '정교하고 과학적인 개입의 질'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뇌 발달의 결정적 시기인 8세 이전에, '올바른 방식'의 상호작용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 연구는 강조합니다.
문제는 우리네 현실입니다. 국가 바우처라는 이름의 지원은 부모에게 잔인한 '택일'을 강요합니다. 한 달 25만 원 남짓한 지원금으로는 언어치료와 감각통합, 인지치료, 미술치료 등 아이에게 필요한 여러 치료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언어치료를 선택하면 감각통합을 놓치는 건 아닐까? 인지 치료를 미루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부모는 매 순간 죄인이 된 기분으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도무지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혼란, 그게 바로 우리가 마주한 '수압'의 실체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부모들은 2~3년을 대기해 어렵사리 들어간 치료실 문앞에서, 아이의 발달 골든타임을 돈 앞에서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내면에서 아무리 튼튼한 잠수함을 지어도, 현실의 제도가 어마어마한 수압으로 그 외벽을 짓누르는 셈입니다.
행정의 편의가 아니라 아이의 속도에 맞춘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시스템은 늘 우리의 시간보다 느리게 움직입니다. 그 답답한 시차 속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할까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 '하나의 치료'를 두고, 혹시라도 자신을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앞서 언급한 연구(Project AIM)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어떤 종류의 치료를 몇 개나 했는가'보다, '단 하나를 하더라도 아이의 발달 원리에 맞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연구에서 가장 유망한 치료 모델로 꼽은 '자연적 발달 행동 개입(NDBI)'은 '질적인 개입'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NDBI는 낯선 치료실 안에서의 훈련보다, 아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치료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이는 국가가 채워주지 못한 치료 시간의 공백을 부모의 자책감으로 채울 필요가 없다는, 가장 과학적인 위로이기도 합니다.
치료사가 50분 동안 애쓰는 상호작용을, 당신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눈을 맞추며 하루에도 수없이 해내고 계십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주고받는 작은 소통들이, 아이의 작은 신호 하나에도 온몸으로 응답하는 당신의 일상이 사실은 가장 정교한 '뇌 자극'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미 생활 속에서 자녀에게 최고의 치료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자녀의 치료를 고민하며 웅덩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면,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바우처가 부족해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면, 그건 포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한 것뿐입니다.
당신은 이미 그 깊은 물 속에서 스스로 잠수함을 그려낼 만큼 단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세요. 망망대해 같은 현실이라 해도, 당신이라는 잠수함은 오늘도 아이를 태우고 가장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by 힐링인사이트 노수정
[참고문헌] Sandbank, M., Bottema-Beutel, K., Crowley, S., et al. (2020). Project AIM: Autism intervention meta-analysis for studies of young children. Psychological Bulletin, 146(1),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