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야~ 하은 씨, 오늘도 멋지네~!”
하은의 두 손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다. 매니저인 지민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하은. 그래도 그저 쑥스러운 미소만 살며시 지을 뿐이다. 클럽 안에는 서서히 사람들로 가득해지기 시작한다. 바텐더인 하은의 직장인 이곳, 레드 벨벳에서는 이 시간이 가장 설렌다. 기대감, 즐거움, 흥분을 가득 안고 들어오는 손님들로 붐벼지기 시작하는 이 시간 말이다.
“에이~ 지민 언니, 또 그러신다. 늘 하는 건데요. 뭐~”
항상 느끼는 거지만, 강남의 밤거리는 늘 복잡하면서도 현란하다. 클럽이 한두 개가 아님에도 단연코 레드 벨벳은 그 속에서 빛이 난다. 그저 그런 흔한 느낌의 클럽이 아니다. 무조건 화려하고 보는 조명 대신에 절제된 듯한 붉은빛은 신비로우면서 섹시하다. 블랙 컬러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클럽 내부는 이보다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울 수 있을까 싶다. 강남의 최고 바텐더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이곳에서 하은은 3년째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에겐 두 번째 집 같은 공간일지도.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달그락달그락. 유리 잔과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경쾌하다. 미소 띤 얼굴로 하은은 완성된 칵테일을 손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이런 색을 볼 수 있을까. 다크 하지만 깨끗하고 짙은 청색 빛의 이 칵테일의 이름은 ‘미드나잇 블루’이다. 마지막으로 데코레이션 한 음료 위의 은색 가루는 붉은 조명 빛에 반짝거린다.
"와, 이거 정말 마시기 아깝네요. 일단, 사진부터 찍어야겠어요."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은 유난히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미드나잇 블루’를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들더니,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깔끔한 외모, 단정하게 차려입은 슈트, 매너 있는 말투를 가진 이런 남자는 여기 강남에서 흔하디 흔했다. 하은 역시 매너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은이 바텐더의 세계에 들어온 지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는 ‘바텐더 서하은’이라는 이름이 제법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런 반응은 어느샌가 하은에게 늘 있는 익숙함이 되었다.
"맛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매니저 지민이 슬쩍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VIP룸에서 자기 시그니쳐 세 잔 주문이야. 서하은~ 오늘도 아주 바쁘겠어."
"네. 입력 완료!"
하은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이 강남에서 판매되는 음료가 과연 얼마나 될까. 수 천, 수 만 가지는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만든 칵테일을 맛보겠다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한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놓고 그런 티를 낼 수는 없는 일. 그저 별 일 아닌 것처럼 대응하는 것도 이젠 자연스럽다.
하지만 때때로 이 모든 것이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외로워서일까.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어렸을 적 일찍 곁에서 떠나갔다. 그래도 할머니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하나뿐인 손녀를 언제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셨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마저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온 그녀에게 삶은 한편으론 그저 반복해야 되는 일처럼 단조롭고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참 사람은 간사한가 보다.
이제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DJ인 박지수의 손놀림과 함께 음악의 비트가 점점 빨라진다. 사람들은 점점 더 음악에 몸을 맡긴다. 더욱 격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은은 유리잔을 닦았다.
그때였다. 하은의 시선이 멈추었다. 한 남자가 클럽 입구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은의 눈동자는 그 남자를 따라서 움직였다. 낯선 일이었다.
'뭐야, 내가 왜 이러지...?'
왜 그렇게 그에게 눈길이 가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잘 생기고 멋진 남자들을 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매일같이 그런 남자들을 마주하며 칵테일을 만드는 하은이었다. 그런데 그는 조금… 달랐다. 그저 잘 생겼다고 표현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그런 느낌이다. 묘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완벽하게 칼 각으로 자리 잡은 검은 슈트,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카락,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듯한 하얀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은 하은의 시선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스캔하듯 훑는 그의 눈은 출구가 없는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빠져들 것만 같았다.
"흐읍..."
순간 하은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남자의 잘 생긴 외모에 대해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긴 다리로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존재감에 하은은 압도되었다.
"엇! 강태오 사장님 오셨네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하은은 귓가에서 들려오는 흥분된 말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칵테일을 준비하던 후배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저 사람 알아?"
"어머, 선배님, 모르세요? 강태오 사장님이잖아요. 왜 '문라이트 셀러'라고, 요즘 뜨는 와인 수입회사 있는데, 거기 대표세요. 여기 VIP 중에서도 VIP이세요! 근데, 크~ 진짜 예술적으로 잘 생겼죠~?! 볼 때마다 제대로 안구정화가 된다니까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훨씬 잘 생기신 거 같아요~"
제대로 흥분한 후배를 보며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VIP’ 뭐 이런 거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겐 그냥 누구나 다 똑같은 손님에 불과했다. 칵테일만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강태오’라는 남자. 그가 들어간 VIP룸 쪽을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하은 씨, 3번 VIP룸에서 시그니처 칵테일 주문~!"
“… 아, 네!”
‘뭐 하니! 서하은. 정신 차려! 일하자, 일!’
하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집중한다. 하은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녀가 이 레드 벨벳에서 ‘강남 최고의 바텐더’라는 호칭을 받게 해 준 칵테일, ‘블러드 문’을 만들 시간. 이 칵테일은 하은의 할머니가 알려주신 비밀 레시피로 개발한 하은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특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칵테일이다.
유리같이 투명하지만 붉은 액체에 할머니가 가르쳐준 특별한 허브를 넣고, 흰 거품으로 보름달 모양을 만든다. 늘 이럴 때면 하은의 머릿속에 할머니 목소리가 스치곤 한다.
'하은아, 우리 가문의 피는 특별하단다. 네 몸의 운명의 표식을 잊어선 안 돼...'
무의식적으로 하은은 손목에 있는 달 모양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이 흉터다. 근데 할머니는 항상 이걸 '운명의 표식'이라고 했다. 그녀에겐 그냥 흉터에 불과했다.
완성된 '블러드 문'을 트레이에 올려놓고 VIP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자 화장실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꺅! 여기요! 누가 쓰러졌어요!"
하은은 반사적으로 트레이를 내려놓고 달려갔다. 종종 있는 일이다. 보통은 경호원이나 매니저가 처리할 일이지만, 그날따라 그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화장실 안은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하은은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코 아래로 손가락을 대보며 숨 쉬는지 확인했다. 다행이다. 호흡은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너무도 창백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이상한 자국이 보였다. 하은은 실눈을 뜨고 자세히 봤다. 꼭 뭔가에 물린 듯한 작은 구멍 두 개가 선명했다.
'이건... 뭐지...?'
일단, 구급차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저기, 누가 119 좀 불러주세요."
주변을 둘러보며 하은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날카로운 저음의 목소리.
"물러나 주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하은의 눈에 들어온 건 그 남자, 강태오였다. 그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하는지 하은은 순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VIP 손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권위가 묻어 있었다. 마치 지시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꼭 자기가 말을 하면 누구든지 따라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하은은 그럴 수 없었다. 이 자가 누구인지 알고 쓰러진 손님을 두고 나간단 말인가.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손님, 이건 직원이 처리할 문제입니다."
태오는 날카로운 턱을 아래로 내리며 살짝 놀란 눈으로 하은을 쳐다봤다. 아마도 자신의 말에 이렇게 토를 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 보다. 그는 잠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꼭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이.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함께 보겠습니다."
태오가 쓰러진 여성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아까 하은이 이상하게 여긴 목에 있는 자국을 주의 깊게 살피는 느낌이었다.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흔적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하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 뭐야? 뭐가 이리 자연스러워? 의사도 아니잖아.'
그때였다.
"이건..."
태오가 무언가 중얼거리는데, 밖이 다시 웅성거린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남성이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들어왔다. 그를 보며 태오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오는 그의 귓가에 짧게 속삭였다. 의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여성을 살펴보았다.
"심한 탈수 증상이네요. 바로 병원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하은의 까만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지금 뭐래는 거야. 탈수라고? 아니,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저 사람이 뭔데 의사를 불러? 의사가 맞긴 한 거야? 저기 목에 있는 구멍은?'
하은의 머릿속은 물음표 투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 밖으로 그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게 이상하고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금방 두 명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들어와 여성을 들것에 실어서 나갔다.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건가? 매니저님 어디 계시지? 사장님은 아직이신가?'
여전히 온갖 생각들이 떠다니는데, 태오가 하은에게 다가왔다.
"침착하시네요."
하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칭찬이었지만 그건 칭찬이 아닌 거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온기라곤 없었다. 그저 무엇을 끊임없이 탐색하듯 쳐다봤다.
"손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하은은 화장실을 나와 바로 돌아왔다. 금세 사람들은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파티는 이어졌다. 역시... 레드 벨벳은 레드 벨벳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파티는 계속된다.
셰이커를 씻고 정리하는데 맞은편에 태오가 앉았다. 그의 눈빛은 좀 전과는 달랐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한 잔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잠시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조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하지만 베일듯한 턱선,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깊은 갈색 눈동자, 창백하면서도 탄탄해 보이는 피부, 말 그대로 태평양 같이 넓은 어깨선.
'몇 살일까?'
30대 후반 같기도 하고, 관리 잘 한 40대 같기도 했다.
"바텐더님?'
"아, 네. 죄송합니다. 시그니처 칵테일 추천드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은은 다시 블러드 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태오의 시선이 자신의 손길만 따라다니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 시선은 묵직했고, 집요했다.
"블러드 문 나왔습니다."
칵테일을 앞에 둔 태오는 잠시동안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언뜻 보면 피 같지만, 자세히 보면 투명한, 이 붉은 액체 위에 가볍게 떠 있는 하얀 보름달 데코레이션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피의 달이라... 흥미롭군요."
태오는 살짝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모금 꿀꺽. 순간 그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떨림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의 눈동자가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헉... 뭐지? 뭘 본거지? 지금 분명 눈이...'
조명 탓을 하고 싶은데, 상당히 높은 적중률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건 착각이 아니라고.
"독특하네요. 특별한 재료라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어보는 태오에게 하은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할머니께 배웠어요. 영업 기밀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어요. 집 안에 내려오는 비밀 같은 거예요."
그때, 태오의 눈빛이 바뀌었다.
"집 안에 내려오는 비밀이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자꾸만 하은은 이 남자와의 대화가 껄끄럽고 불편했다. 하은은 자리를 피했다. 바쁘게 보이려고 칵테일 잔을 정리했다.
"앗..."
과일을 깎는 작은 칼에 하은의 손가락이 살짝 스치고 말았다. 이런 실수를 잘하지 않는 하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긴장이 된다. 가벼운 상처였지만, 갑자기 손목의 달 모양 흉터가 화끈거린다.
"윽..."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그녀는 신음을 뱉었다. 태오는 재빠르게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녀가 부여잡고 있는 손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얼굴엔 놀라움, 의심, 그리고 뭔가... 깨달음 같은 감정이 깃들었다.
이상한 열기가 손목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가, 이건 운명의 표식이야.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다시 하은에게 다가온 태오는 슈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쪽으로 연락 주세요."
명함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문라이트 셀러 대표 강태오'라고 적혀있었다. 명함을 뒤집어 보는데, 메모가 적혀있었다.
'당신의 흉터는 운명의 표식입니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을 땐 태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빈자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건... 할머니만 쓰셨던 표현인데... 이걸 대체 이 남자가 어떻게 아는 거지? 이 흉터는 또 왜 이러는 거야...?'
그리고 사실 제일 궁금했던 것.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히 보았던 그 붉은 눈. 그건 대체 뭐였을까?
여전히 음악 소리와 손님들의 환호성으로 시끄러웠지만 그 시간 하은의 주변은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미지의 세계 속에 있었던 비밀의 문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었다.
손목의 흉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태오의 명함과 흉터를 번갈아 바라보는 하은의 눈빛에는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이상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 남자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