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덜컹덜컹 학굣길과 계속되는 검문

어쨌든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 옷은 좀 참고 입어봐 넌 내면이 이뻐 미안

by 정이안

이주 준비를 하며 아이를 키우고 회사를 다니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을 주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숨 쉬는 게 무슨 수의근인 양 내가 세어가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출국하면서 이제 살았다 싶었는데 도착하니까 남편이 출장을 바로 가버렸다.



여기서도 나와 아이 둘 뿐이다.



외국 오자마자 이게 무슨 일인가.

그냥 입학을 늦춰?


학교는 이미 개학했다!
다음 주부터 일주일 학교 쉰다!!
학비는 이미 지난달치부터 내고 있다!!!


물러날 곳이 없다.
내 일이면 벌써 물러났지만 아이의 일은 그럴 수가 없다. 부모가 된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게... 나는 과연 출생의 비밀이 있을까. 1화 참고)






지역 내비를 깔고 학교를 찍은 후 어떻게 가나 막 생각하다가 애를 쳐다보니, 애가 입고 갈 옷이 마땅치가 않았다. 찌는듯한 한여름을 생각해서 옷을 챙겨 왔는데 막상 와 보니 날이 좀 선선한 거다. 그래서 내가 야심 차게 준비한 한국 학생 최고 유행템 ㅡ 넓은 통의 얇은 회색 추리닝바지 ㅡ를 꺼내줬다.


아침을 해먹인 후 내비를 따라 지난밤에 연습주행한 대로, 포장도로이지만 비포장도로 같은 놀라운 길을 덜컹덜컹 달려 학교에 도착했다.


올릴 사진이 없음.
왜냠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너무 힘들어...


학교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컷 당했다.
미리 남편에게 전달받은 내 얼굴 박힌 학부모증을 보여주고 학교 지하주차장 진입.


걱정돼서 일찍 온지라 여유롭게 주차하고 애랑 올라가는데,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입구가 나왔다. 열을 지어 있는 개찰구들마다 줄줄이 카메라가 있는데 얼굴인식으로 문을 열어줬다.


개찰구 옆 리셉션에서 사진을 찍고 얼굴등록을 한 후 (사진 찍는 게 완전 범죄자 머그샷 재질) 여차저차하여... 입학처를 찾아 담당자를 만나고 카운슬러를 만나고 하는데


이 선생님들이 저 살던 한국 동네에서 오셨네요? 거기 국제학교 근무하셔서.. 우리 아파트 이름 듣더니 어딘지도 앎 ㅋㅋㅋㅋㅋㅋㅋ 근처 아파트 사셨네요.
이역만리 타국 선생님들과 동네 맛집 근황 토크. 사실 서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어떻게든 대화하려고 애쓴 거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그렇게 아이는 학교에 남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학교를 나왔다.




오 할만한데?
하하하 입학 끝났다.


다시 오프로드 같은 포장도로를 한 시간 달려 무사히 아파트 출입구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롯데캐슬 출입구라든가 래미안 출입구 이런 것이 아니다.

무슨 국방관련 시설을 보호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높은 철창문이 거대하게 솟아있는데, 그 철창문도 심지어 여러 겹이고, 그 주변을 제복을 입은 시큐리티들이 서 있다. 주민이 아닌 사람용 검문오피스도 있다. 그게 아파트 입구다.



시큐리티가 다가온다.
날 처음 보겠지? 하지만 난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까 말 걸지 마세요 속으로 말하며 리모컨으로 출입구 철문을 열어버렸다.



차고를 연다는 건 집의 온당한 주인이라는 것!
검은 양복을 빼입고 귀에 이어폰 끼고 무전기 들고 인상 쓴 경비원도 나를 제지하지 못하지!


하지만 차고입구를 열면 두 번째 철문이 또 있다는 거!!!
거기서 경비원이 차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할 거니까 차를 언락 unlock 해주라고 남푠이 신신당부했었다.


결국 검문을 탈탈 당한 후 진짜로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침의 대모험으로 정신이 탈탈 털린 채 집으로 올라와 냄비에 커피물을 올렸다.

커피까지는 내가 가져왔는데... 주방에 냄비만 있다. 냄비째로 커피 마셔봤어요? 호호 이것이 바로 트로피컬 라이프

는 무슨
그릇은 없고 남편이 라면, 냄비, 물만 사다 놨다.
이것은 안전가옥에 넣어둔 생존키트인가요.

그 후로 며칠간을 이 집이 대체 무슨 용도의 집인지, 남편의 직업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상상했다.



이중 검문을 거쳐 들어온 집에서, 철그물이 쳐진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냄비 손잡이를 양손에 잡고 커피를 마시다 보면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남편은 과연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을까.






숨을 고른 후 다시 내비를 돌려서 가는 길을 이미지트레이닝 하고, 하교 픽업을 갔다.


주차장에서 애를 기다리며 나오는 아이들을 보는데...
우리 애만 패션이 너무 다르잖아!


내가 심혈을 기울여 최신 유행의 애슬레져룩으로, 즉 벙벙한 츄리닝으로 아이옷을 장만하여 이고 지고 왔는데... 이 나라는 숨 막히는 쫄청바지, 그것도 배바지에 딱 붙는 티셔츠를 넣어 입는 게 국룰인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 애 안내해 주는 앰버서더 학생은 머리가 반쪽만 보라색이었음...



이런 언니들 사이에서 빅사이즈 추리닝 입은 한인어린이....



하지만 옷까지 사러 갈 순 없다.
비록 찐따룩이더라도 일단은 등하교를 안전하게 해내는 미션까지밖에 못 해 드립니다 고객님.


그렇게 우린 집에 와서 이민가방을 뒤져 고추참치를 꺼내 먹고...
(글로 쓰니 너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없다. 바닥에 앉아서 아까 커피마신 그 냄비에 밥 해 먹음)



둘 다 너무 피곤해서(애는 시차때문에 학교 첫날부터 졸았다고 한다) 바로 쓰러져 잠을 잔 후 다음날 등교를 준비하는데,


냉수가 안 나온다.
뜨거운 물만 나온다.


냉수가 안 나오면
변기물도 안 내려간다.



까아악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