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재난이로다
화장실 좀 고쳐주세요 씻게 해 줘요 변기 마음껏 쓰게 해 줘요
previously on 주재원 부인 https://brunch.co.kr/@jujaewonbuin/13
오늘은 안 씻고 나왔다... 헤헤
남편에게 모닝 독촉문자를 보내고
덜컹덜컹 아침 등굣길을 무사히 거쳐
학교 주차장에 애를 내려주고 잠시 차를 세워둔 채 구글지도로 검색을 했다.
'마트'를 치니까 아직 구글지도가 적응을 못했는지 한국지도에서 마트를 찾아준다. 야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
mart. supermarket. market.
처음 유럽에 살 때는 grocery로 검색했었지.
이젠 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마트다.
아무튼 검색을 막 했는데 모르겠다. 상호명에 마트가 없다.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눈앞에 슈퍼를 갖다 줘도 그게 슈퍼 입구인지 알 수가 없다.
거 있잖아요.
돼지가 웃으면서 어서옵쇼 하는 간판이 있는데 외국인은 그게 돼지고깃집인 거 알고 나서 소름 돋았다는... (나 먹으러 오세요도 아니고 대체 뭐냐고)
자매품으로 할머니손칼국수도 있죠
고기국수 멸치국수 할머니(!)국수
상식이란 어디까지나 적용범위가 지역적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한 나라에서 쭉 자라온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법칙이,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에게는 세상의 법도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만국공통 인류가 추구하는 상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 예를 들면 전쟁에서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던가 - 최근 미국이 수업 중이던 이란 초등학교를 폭격하고서, 사과와 반성 없이 백악관에서 보란 듯이 축복의 미사를 올리는 행태를 보면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실수였다면 좀 당황하는 제스처라도 해야지 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슈퍼 어디야...
무한 구글링...
한인들의 댓글 중에 괜찮은 슈퍼라고 하는 곳을 찾아냈다.
칼... 칼을 사야 해
도마까진 바라지 않겠어
사냥을 해와도 잘라야 할거 아냐
그리고 컵...
접시도....
고급 아파트에 사는 엄마 자연인과 어린이 자연인.
고급진 원목 바닥에 냄비와 참치캔을 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냄비 안에 참치캔을 따서 탈탈 털어 넣고 참기름을 넣고 펄펄 날리는 쌀에 비벼서 야무지게 냠냠.
(그 와중에 고이고이 항공직송한 비비고 캔참기름 너무 맛없어서 화남)
스님들의 발우공양이 생각난다. 밥을 다 먹은 후 발우(그릇)에 물을 넣어 남은 밥알과 반찬을 깨끗이 씻은 후 그 물을 입가심으로 마시는 스님들처럼... 하기가 저는 어렵네요 저는 커피라서요 잽싸게 냄비를 씻습니다.
엄마 자연인은 후식으로 냄비에 커피를 끓여 그 냄비째로 입에 부어 넣는다.
어린이는 입에 페트병을 꽂아 병나발을 분다.
이건 이제 싫다고.
마트에 무사히 도착했다.
근데 지하주차장이 어마 크다.
아침이라 사람도 없는데 무서워서 여기저기 차를 대어보다가 시큐리티가 잘 보이는 곳에 최종 주차했다.
괜히 자신감 있는 미소를 띠고
떡진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활기차게 걸어갔다.
쫄아서 그랬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보니 여긴 쇼핑몰이었다.
아직 가게 대부분이 문을 안 열었는데
오 스타벅스가 열려있네?
스타벅스는 맛없다 그렇지만 너무 반갑다 왜냐면 아는 곳이라 뭘 파는지 알아서 안심된다.
슈퍼 입구를 찾아 들어가니 신세계다.
너무 좋다.
직원에게 칼이 어디 있냐고 번역기로 물어보았다.
직원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임을 알고 그냥 나를 코너까지 데려다주었다.
감사하다고 한 후 진열된 칼들을 살펴보니 마체테처럼 생겼다..
캠핑코너인가 뭔가 나무로 된 것들도 막 있다...
지금 글을 쓰려고 마체테를 확인차 검색하니 손석구가 연관검색어로 뜬다. 영화에서 썼다고.
언제 이런 걸 찍었대
내가 왜 마체테를 아는지 나도 궁금하다.
아무튼 그중 적당한 칼을 골랐다.
더 찾기도 귀찮다.
배고프다.
그리고 컵이 보이는 대로 한 세트 통째로 집고
접시가 보여서 3장 집었다.
내 인생 부엌용품을 이렇게 금방 고른 적이 없는데 그냥 빨리 사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린스를 샀다.
녹물에 개판이 된 내 머리를 구제할 린스.
너무 좋은 게 슈퍼에 진열된 물건의 용도가 뙇 보인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유럽은 유럽식 문화에 유럽 브랜드라 한국인으로서 처음 가면 한 개 한 개 번역기 대서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봐야 했다.
여긴 크게 나누자면 미국식이고 한국도 미국식이기 때문에 마트 물건 사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이나라 말을 몰라도 대략 알 거 같은 단어도 꽤 보인다.
(내가 아는 말)응 그래
-> (여기 말) 오 그랫제. 어이 그라요오.
이런 식으로.
운이 좋으면 여기 말도 대략 유추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파트 엘베에 붙은 것을 읽어보니
not..... 공지 잘 봐라 fume.. 불나면 prohi.. 금지 elev.. 엘베..
그러나 리스닝과 스피킹은 절대 적용이 안된다는 거. 문법주입식 외국어교육 반대합니다.
자 공산품을 샀으니 이제 신선한 식량을 구하자.
이거 뭐게요
저 꼭지 저거 저거
캐슈열매랍니다.
마트에서 검색하다 내적 충격받음.
저 꼭지가 캐슈넛이라고 함.
과육만 먹고 캐슈넛은 버렸어요.
저거 손으로 까면 독해서 안된다고 함.
아테모야(체리모야와 석가 교배종)
맛은 서양배 뭉개서 부드럽게 체에 거른 + 잭프룻향
다음은 캐슈 다음으로 충격이었던 놈.
믿을 수 없어서 ai에 사진 넣고 물어봄...
이것은
무려
아보카도입니다.
나만 놀랐나
난 뚱쭝한 호박인 줄
믿을 수가 없어서 일단 안샀...
으나 현재 이 글을 편집하는 오늘은 사 와서 먹었다.
맛없네요 왜 쓴맛이 나는 거죠. 아마 먹는 법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가 봐요.
카트에 산더미처럼 쌓아 계산대에 가니 계산대 언니가 뭐라고 말을 건넨다.
그냥 저는 모릅니다라고 표정으로 말하니 친절하게도 두 번째 직원이 와서 내 과일 봉지를 가져갔다. 아하하하 무게를 안 쟀네요. 전 개수대로 파는 것인 줄.
누가 봐도 이제 막 여기 온 외국인이니 봐준 게 아닐까?
칼과 접시와 컵과 과일과 린스를 한 번에 사는 주민은 드물지 않나요.
계산하다가 파파야가 나오니 또 세 번째 직원이 와서 무게재러 갔다.
그리고 네 번째 직원은 물건을 일일이 포장해 준다.
내가 과일 무게 안재고 와도 웃으면서 그냥 해주는 그 모습 넘 고마움..
독일 슈퍼에서 캐셔에게 혼나고 정육점에서 자기들끼리 손 양쪽으로 들고 고개 절레절레 놀림당하던 일들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한번 욕 좀 하고.
독일은 인종차별이 심합니다. 그러나 과거사를 인정하고 탈탈 털어 밝히는 것을 보면 외국인이 봐도 어질 할 정도인데 이건 분명 일본과는 비교도 안되게 훌륭한 태도이다. 글의 통일성에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인걸 알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 하려고 브런치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아무튼 이렇게 인류애 충전하고 식량과 도구 사냥도 성공하고 자신감 뿜뿜!
원래 마트 주차료 안내도 된다는데 내가 주차권을 안 뽑아서 (어쩐지 들어가는 곳에 뭐라고 가득 쓰여있는던데 잘 몰라서 그냥 통과함) 돈 내는데도 기분이 엄청 좋았음.
그리고 나오는 방향도 잘 잡아서 무사히 도로로 나오고 몇 미터 안 갔는데
펑! 퍼퍼펑!
이게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