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산업화 시기 아님, 시골에서 자라지 않음, 한국생활 정리
우리 아버지 별명은 장군님이다.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면 꼭 진행과정과 그 결과까지 확실하게 보고하기를 가르치셨고 명령불복종과 하극상은 참형에 처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 별명을 입밖에 내본 적은 당연히 없다. 둘째 동생에게 문자를 보낼 때 "장군님 화나셨냐" 뭐 이런 대화로만 써봤다.
장군님은 자녀 객관화가 잘 되어있어서 나를 노력한다면 발전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대우하셨다. 그리고 내가 살며 알게 된 모든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중에서 가장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하신 분이시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바로 취업이 보장된 전문대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셨으나(전문대 하나를 꼭 찍어주셨다) 결국 서울대에 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차라리 이화여대에 가면 시집이라도 잘 가는데 왜 니 마음대로 서울대를 가냐고 지 멋대로 산다고 화를 내셨다.
당시 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몇몇 짐작되는 대회가 있긴 하다) 고3 입시철 전에 미리 몇몇 의대에서 입학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의대 투어를 하며 교수님과 면담을 했는데 부모님의 결론은 대학생활 내내 공부만 하다가 의사되어서 진료실에 갇혀 아픈사람만 보면 안좋다 였다. 나도 사실 의대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릴적 내 꿈은 동네 서점 주인이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어린 아이일 때부터 수학선행을 시키며 성적순으로 의대를 채우고 그 다음에 서울대를 들어간다는 요즘 세상에는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이런 제도는 지금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기 전부터 과외를 뛰었다. 대학에 합격한 후에는 학부 사무실로 찾아가 장학금을 거절했다. 내가 받은 장학금은 학비에서 차감되는 방식이었고, 학비는 아버지 회사에서 지원되기 때문에 어차피 장학금이 내 손에 들어오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면 또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런건 아니다. 그 당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부장님이 우리 아부지였다. 동생들은 아르바이트 없이 사립대를 용돈받으며 다녔다. 막내는 스포츠카를 대학입학선물로 받았고 중국 유학도 짧게 다녀왔다.
하지만 내 유학은 반대하셨다. 언론에 자주 보도되던 시간강사들의 고달픔을 언급하시며 대학 교수가 되기 어렵다는 이유와 함께, 너에게 줄 돈은 없는데 혼자 돈 벌면서 유학하면 그 고생을 어떻게 감당하냐 였다.
아니 나는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생각했다. 부양의 의무가 없고 누구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 20대가 선택하지 못할게 뭐가 있는가?
여러 개의 과외를 뛰면서 GRE 준비를 하던 중 .. 상을 당했다.
나는, 그만,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고, 결혼을 했다.
코스피 6천시대의 한국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상당히 압축된 이야기이다. 내 20대는 대충 이력서용으로 추리기만 해도 길다. 아무튼 이건 내 입장의 기억이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서사가 있을 것이다. 막내아들을 위해 아끼고 아껴오느라 그랬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너는 알아서 잘살지 않니 라고 하는, 오래된 드라마같은 진부한 대사 말고 내가 모르는 서사가 있기를 크게 기대한다.
갑자기 왜 내 이야길 하게되었냐면 ...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카톡을 받았기 때문이다
집팔고 차팔고 직장 정리하고 그렇게 한국생활을 마감한 후 남편을 찾아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나를 전송한 후 모인 자리에서 아부지가 내 칭찬을 하셨다는 거다. '이안이가 든든하니까 신랑이 믿고 먼저 홀랑 가버렸다. 와이프를 잘 만나야 된다' 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에게 칭찬을 해본 적 없는 분이라 동생이 놀라서 바로 카톡을 보내며 아부지가 나이가 드셨나보다 걱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