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
2024년 11월 27일, 이날은 117년 만에 폭설이 내린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눈이 절정을 맞이했던 14시경, 유치원 하원 시간이 임박해 오는 가운데 유치원 엄마들 단톡방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폭설로 인해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여 아이들이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나와야 한다는 공지였다. 그 비포장도로는 제설작업이 하나도 되지 않는 길이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숲유치원이다. 인적 드문 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큰 도로에 맞닿은 비포장 도로에서 약 5분 정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무사히 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중 2차 공지를 받았다. 차량이 6차선 큰 도로 언덕길도 올라오지도 못하기에 아이들이 식당가가 있는 언덕까지 내려가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엄마들이 당장 아이를 직접 데리러 오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인도가 없는 길을, 차량이 언덕을 오르다 미끄러지고 있는 그 길을 어린아이들이 걸어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우리에게 '재난'이 닥쳤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차도 못 오르는 길을 아이들이 잘 걸어올 수 있을까. 우리 집 아들은 그래도 일곱 살이지만 동생들은 괜찮을까. 쫄보인 내가 얼음길 운전을 잘해서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온갖 걱정들로 얼굴이 상기됐다.
차로 가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판단되어 걸어갈 채비를 했다. 장갑과 따뜻한 물을 챙기고 아이의 방한부츠도 하나 짊어지고 나갔다. 그러던 중 아이 친구 엄마와 급하게 통화 중 본인이 그리로 가고 있으니 우리 아이도 함께 데리고 집 근처까지 와보겠다고 해주셨다.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다.
하늘이 원망스럽다가도 고마웠던 건 갑자기 해가 반짝 비춰주어 도로상황이 한결 나아진 것이다. 이윽고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집 근처에서 얼른 아들 얼굴을 살펴보았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어느 사진에서 본듯한 볼이 새빨간 북한 어린이를 연상케 했다.
"아들, 오늘 고생 많았지? 힘들었지?"
"아니!! 엄청 재밌었어 엄마, 이런 게 우리 유치원 장점이잖아!"
숲유치원의 장점은 말해 뭐 하냐만은 '장점'이라는 말에 오래간만에 샤우팅을 할 뻔했다. (어미는 목이 타고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장점이라니. 이건 아니다 이눔아!!!!!) 집에 와서 뜨신 물에 목욕을 하고 집 나갔던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한참이나 시간이 필요했다. 유치원에서의 눈놀이와 행군한 무용담을 조잘대는걸 한참 들으며 겨우 옅은 미소 정도 지을 수 있을 즈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남자 주인공 모습이 머릿속에 오버랩이 되었다.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유쾌한 남자 주인공 '괴도'가 사랑하는 여인 '도라'를 만나며 벌어지는 재밌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그저 오래 지난 가벼운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중후반이 지날수록 묵직한 뭔가가 올라와 왼쪽 가슴이 묵직해지는 영화였다. 부모로서 저런 상황에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를 계속 외치게 해주는 그런 영화.
저런 상황은 전쟁상황 즉,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말한다. 상점에 '개와 유대인 출입금지'를 자연스레 붙여 놓는 시대적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유대인인 괴도와 그의 아들 '조슈아'가 강제징용과 학살의 현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일고여덟 살즈음 된 조슈아는 끌려가는 상황이 이해되지도 않고 불쾌하다. 그때 유쾌한 주인공 괴도 아빠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 게임에 참가하러 가는 거야. 너무 재밌지 않겠니?"
끌려온 유대인들이 머물 숙소에 도착하자 독일군 장교가 들어와서 독일어가 가능한 사람을 나오라고 한다. 괴도는 주저 없이 미소를 띠며 손을 들고 나와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군 장교의 말을 수려하게 동시통역하기 시작한다. 물론 가짜 통역이다. 독일군의 겁박 가득한 공지사항 전달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괴도는 조슈아에게 게임규칙을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조슈아는 매우 신이 났다. 게임에서 1등을 하면 무려 진짜 탱크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괴도는 늘 웃으며 조슈아를 챙기고 게임 속 현실을 직시시켜 준다. 어렵사리 그 시간들을 견뎌낸 부자에게 드디어 탈출의 기회가 왔다.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룻밤만 잘 견디면 그곳을 탈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극적이게 슬픈 장면 없이 끝끝내 유쾌하고 마는 괴도. 그래서 더욱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의 마지막 장면을 뒤로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여운이 생각보다 긴 영화였다. (조슈아 앞에서 마지막 괴도의 모습이 궁금하시면 직접 영화 찾아보시기를...)
겨울왕국이 되던 그날 아이들은 각자 짐 보따리를 들고 행군을 하며 먼 길까지 걸어 나왔지만 불평 없이 씩씩하게 모두가 무사히 걸어 나왔다고 한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매우 기특해하셨다. 그리고 재미있었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 아들을 보며 이내 나는 깨달았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위기상황이 닥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순간 '괴도'의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했을지. 폭설을 만난 피난민처럼 한 짐 짊어지고 걸어가면서도 힘듦보다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느꼈던 아이들은 모든 상황을 놀이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매일 텃밭을 일구고 절기마다 해야 할 일들 앞에서 '아이들은 일하는 게 노는 거래. 그래서 재밌어.'를 말하던 아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 재난에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는 아이들에게 걱정과 불안을 내비치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선생님들의 깊은 노력이 담겨있었다.
무시무시한 전쟁이 종결되며 영화가 끝이 났듯, 유치원도 재난과도 같았던 눈이 그치자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습설로 인해 아이들 생활공간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내린 탓이다. 한 순간에 유치원과 자연에서의 놀이시간을 잃은 아이에게 어찌 위로를 하면 좋을지. 초등 입학 전 3개월 강제방학이 생겨버린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두가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어쩌면 나에게는 긴긴 방학이 진짜 재난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제는 내가 아이에게 인생은 아름답다고 이야기해 줄 차례. 이제는 내가 '괴도'엄마가 되어 아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차례인 듯하다. 괴도나, 유치원 선생님처럼 내공이 깊지 않은 내가 과연 가능할지는 일단은 좀 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폭설로 기록될 2024년 11월 27일은 나에게도 다른 의미로 매우 특별한 날로 기억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