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는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원에서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 학원에서 문제를 풀기 싫어서 울었다. 선생님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내 앞에서 울지 말라며 다독여주었다. 그러다 중학교 올라가서는 학원에 가기 싫다고 울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바쁜 틈을 타서 학원을 빠지기도 했다. 학원을 빠지는 건 처음에만 어려웠다.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하지만 결국 들통나서 된통 혼났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학원에서 울기 시작했다. 이제는 엉엉 소리 내어 울지는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서 눈물을 훔쳤다.
공부를 잘한다는 건 나의 정체성이었다. 엄마의 자부심이자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는 변두리로 밀려났다. 반에서 10등 안에는 드는 아이, 그 정도. 더 이상 “그린이 엄마가 대체 누구예요?”하며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때 내가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외국어고등학교 입학이었다. 당시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며, 너도 나도 해외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에는 외국어고등학교가 있었다. 외고 입학의 주요 변수는 영어 실력이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는 아직 잘하던 내가 패자부활전을 시도하기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나를 무너뜨린 건 공부가 아닌 같은 반 아이들이었다. 나는 친구와 다툰 후, 다음 날 무리에서 내쳐졌다. 곧이어 반 전체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체육 시간에 피구를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타겟이었다. 주동자는 체육을 잘했다. 그 아이는 나를 겨냥해서 공을 세게 던졌다. 다른 아이들은 방관했다. 많이 아팠다. 처음에는 피해보다가, 그냥 빨리 맞고 퇴장하는 게 해답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선 밖에서 수비할 때에도 상대방이 공격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체육 시간에 아프다 하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기도 했다.
그 외에도 따돌림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되었다. 어떤 어른들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외고 합격을 해야 걔네가 나를 무시 안 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가해자 중에는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교권 10위를 다툴 정도의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공부만이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성처럼, 그럼에도 날 증명할 길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다들 외고 입시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며 조바심이 났다. 따돌림을 피해 반을 옮기고, 외고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이제 학원에서 울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계속 의문이 맴돌았다. ‘왜 내가 외고에 가야 하는 거지?’하며 말이다. 외고를 합격했다는 명예는 탐이 났지만, 그 이후의 생활이 무서웠다. 치열한 내신 경쟁을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고 입시에 전념을 하면서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은 전형일이 다가올수록 더 커졌다. 그러다 경기권 Y외고의 전형 등록 날짜를 알면서도, 이미 기한이 지나서 접수하지 못할 것 같다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기한을 놓쳤다고 혼나는 것보다 시험을 보는 게 더 두려웠다.
결국 나는 서울권 H외고만 지원했다. 그리고 낙방했다. 그런데 나는 통곡했다. ‘외고 합격’이라는 명예를 쟁취하지 못한 게 분했다. 외고 입학 이후의 경쟁을 두려워했음에도, 입시를 치르는 걸 그만두고 싶어 했음에도, 그 순간에는 절망스러웠다. 더 이상 내 손에는 나의 가치를 증명할 만한 게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곧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SKY 대학에 입학하는 거였다. 그리고 친구랑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자고 약속했다.
[표지 사진 출처] : Unsplash의 Nick Page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dDZ1JjQXm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