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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린 Sep 06. 2023

국어국문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이상했다. 막상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나는 더 이상 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전에 사법고시 합격이라니.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나의 한계를 알았다. 나는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로스쿨에 진학하자니, 그건 너무 새로운 길이었다. 그래서 법조인이 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증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SKY 대학에 입학하자는 목표는 유지했다. ‘그럼 어느 학과에 진학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가 남았다.


나는 내가 잘하는 걸 생각해 봤다. 영어와 글쓰기가 있었다. 외고 입시의 여파로, 영어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영어는 내가 다른 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하는 것일 뿐, 절대적으로 잘하는 과목은 아니었다. 영어 지문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즉석에서 영어로 말하려면 긴장됐다. 반면 글쓰기에는 마음이 유독 끌렸다. 중학생 때부터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항상 수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재능도 있다고 생각했다. SKY 대학에 문예창작학과는 없으니, 국어국문학과를 가자. 그렇게 결정했다.




나는 글쓰기에 왜 유독 끌렸을까? 일단 글을 쓰면 좋은 성과가 있어서 뿌듯했다. 나는 학업적으로는 계속해서 뛰어난 학생의 반열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런데 글쓰기에 있어서는 여전히 뛰어난 학생인 것만 같아서 기뻤다. 글쓰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있었다. 일상 속에서 영감을 포착해서 글로 그려냈을 때의 뿌듯함. 남들에게 보여주긴 민망하지만, 나는 내가 완성한 글이 참 좋았다. 나는 ‘영감 노트’라고 부르던 작은 노트도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글감을 수집했다. 그 노트에서는 언덕 위를 굴러다니는 낙엽도 좋은 글감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나의 진로희망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부모님은 내가 판사가 되었으면 했다. 부모님은 국어국문학과 가서 뭐 해 먹고살 거냐며 걱정하셨다. 하지만 나는 내가 법조인이 되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게 승산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를 고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내가 소설 쓰기에 재능이 없는 걸 깨닫고, 진로희망에 수필가를 추가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부모님은 나에 대한 진로희망을 변호사로 바꿨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판사보다는 되기 쉬운 직업으로 허들을 낮춰준 셈이었다. 하지만 나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국제학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국제학부에 가길 바랐다. 한국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변호사가 되길 바라는 소망에서였다. 엄마는 내가 국제학부에 지원해야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줄곧 수시 논술 전형을 준비하던 나는 당황했다. 아빠는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결국 엄마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일단 국제학부에 원서를 넣었다. 면접 대상자가 되고 나서부터 벼락치기로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E대학의 국제학부에 최종 합격했다. 노트북 화면을 보던 내가 “합격이래!”하는 순간 엄마는 아빠를 얼싸안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처음 본 광경이었다. 나는 E대학과 S대학 국어국문학과에도 합격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엄마가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왠지 국제학부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동안 뒤로 밀려나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무언가 다시 성취를 이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국제학부에 진학했다. ‘이제 됐다’하며 마음속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참고자료] 고등학교 때 진로지도상황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Pablo García Saldaña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lPQIndZz8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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