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그린 Aug 09. 2023

'여프로' 간다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여프로 갈 거야!” 어릴 적 나는 매번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판사를 발음하지 못해 ‘여프로’라고 말한 것이다. 여판사가 된다도 아니고, 여판사로 간다니. 발음도, 문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어린 나이였다. 판사도 아닌 ‘여판사’. 남자든 여자든 판사는 판사지, 여판사라고 따로 말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적어도 어린아이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아빠는 개천용 법조인이었다. 아빠가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온 동네 거리에 현수막이 걸렸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친할머니의 자부심은 그 현수막 크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컸다. 그 밑에서 엄마는 호되게 시집살이를 당했다. 딸을 낳은 죄로, 친할머니는 깍둑 썬 단무지와 밥만 주고는 엄마에게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한다. 그래서 엄마는 꼭 법조인 자식 하나 키워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린이 엄마가 대체 누구예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궁금해했었다. 또랑또랑 발표를 잘하고, 공부도 잘했던 내가 사람들 눈에 띄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내 사촌들과 함께 엄마는 동생과 나를 데리고 혈혈단신으로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많았던 나이. 아빠의 해외 연수 기간까지 합쳐 2년 반의 해외 유학 생활에는 엄마의 희생이 있었다. 처음 외국에 도착했을 땐 영어 그림책을 읽어보다가 어려워서 펑펑 울었던 내가, 어느새 엄마를 대신해 통역할 정도의 영어 실력을 기르게 되었다.     


나는 어딜 가든 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 꿈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유학 시절, 외국인 친구가 내 꿈을 듣더니 “그럼 너는 로스쿨(law school)에 가야겠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로스쿨을 low school, 즉 ‘낮은 급의 학교’로 알아듣고는 친구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나는 high school에 갈 거야!”라고 말하며 말이다. 그때 나는 그게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줄도 몰랐다. low의 반대가 high이니, 높은 학교에 가겠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낮은 학교를 다녀서는 판사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학을 마치고, 5학년 2학기에 대치동에 입성했다. 하루에 수학문제 100개를 풀고, 사흘에 한 번 꼴로 영어 단어를 200개 외우고 50개를 시험 봐야 했다. 5학년 때 일기장을 보면, 한국에 오니 공부, 공부, 또 공부라며 짜증 내는 글이 쓰여있다. 특히 불편한 게 있었다면, 가방 무게였다. 학원에 짊어지고 가야 할 영어 원서가 너무 두꺼워서 친구들은 바퀴가 달린 가방을 끌고 다녔다. 나는 그 가방을 질질 끄는 게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무를 한가득 둘러멘 나무꾼처럼,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영어 원서를 짊어지고 다녔다. 초등학생의 체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의 대치동 적응기는 순항하는 듯했다. 5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치동의 기준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다. 외부 영어 발표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해서, 학교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발표 시연을 하기도 했다. 회장 선거에서 낙선해도 계속 출마해서 기어코 학급 회장이 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충분히 어른이 되었을 때 판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왜 판사가 되어야만 하는지는 몰랐다. 학원 수업 듣기 위해서는 교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처럼,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교재가 무거워서 등을 구부릴지언정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표지 사진 출처]사진: Unsplash의 Vrînceanu Iulia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EL_1-pVO2gw)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