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의 입시 경쟁은 라떼에도 치열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본격적인 입시 경쟁은 중학생 때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은은한 경쟁이 있었다. 이때 기준은 어느 학교를 다니느냐보다는, 어느 학원의 어느 반을 다니는 지였다. 아이들을 유명한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게 모두의 목표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D국제 중학교도 없었기 때문에, 학군지의 일반 중학교로 사람들이 모였다. 그래서 중학교 입시에 열을 올릴 일이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나누는 기준은 학원에서 진행하는 입반 테스트였다. 어떤 영어 학원에서는 지필고사를 본 다음, 원장님과 면접까지 봐야 했다.
나는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영어학원이었던 L학원 입반에는 실패했지만, 그다음으로 유명했던 I학원 입반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학원에서는 정기적으로 레벨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 성적에 따라 반이 재배정되었다. 반은 한 학년 안에서 1에서 4 수준까지 나뉘어 있었다. 1 수준으로 갈수록 높은 반이었다. 이렇듯 어느 학원 어느 반이냐는 학생의 ‘급’을 나누었다. 그렇다고 급을 나누어 위계질서를 세우거나, 누구를 따돌리지는 않았다. 대신 한 사람의 공부 실력이 매번 다양한 방식으로 수치화되었고, 모두들 그 학생이 어느 정도 수준에 서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수치는 수시로 갱신되었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 경쟁은 순한 맛이었다. 중학생 때는 민사고, 과학고를 갈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외고 입시를 준비했다. 당시 외고 입시 3대 학원은 I학원, T학원, P학원이었다. 가장 들어가기 어려웠던 곳은 P학원. 가장 유명했던 곳은 I학원의 원장 선생님 반. 그리고 가장 학생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곳은 T학원이었다. 나는 I학원의 원장 선생님 반을 다녔다. 어떤 아이들은 세 학원 모두를 다니기도 했다. 도무지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다. 하나의 학원만 다녀도 숙제량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학원에 갈 때마다 시험을 봐야 하는 단어 개수도 엄청났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숙제를 하고 단어를 외워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잠을 줄여가며 간신히 버텼다.
그때 당시엔 학원 교습 10시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새벽 3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외고 입시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때까지 강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신 학생들이 자습할 수 있도록 학원에서 큰 교실 하나를 마련해 주고, 새벽 3시까지 공부할 수 있게 했다. 필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타오르는 경쟁심에 학생들은 너도나도 새벽 3시까지 남아서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도 학생인데, 그때까지 남아있던 선생님들도 어떻게 남아있었나 싶다. 새벽 3시라 부모님이 데리러 올 수도 없었다. 공부를 마치고 나는 혼자 집에 걸어갔다. 새벽 3시에 걷는 거리는 생경했다. 가끔 바닥에 쓰러져있던 취객을 제외하고는,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만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학원 교습 10시 제한이 생겼다. 당시엔 획기적이었다. 학원이 10시 땡 하면 끝난다니! 어떤 학원은 창문을 시트지로 가리고 10시 이후까지 영업하거나, 가정집에서 과외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는 다행히도 10시에 맞춰서 수업을 끝내는 학원만 다녔다. 하지만 우리에겐 숙제가 있었다. 새벽 2시까지도 잠에 못 들게 하던 엄청난 양의 숙제.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친구들끼리 어떤 커피가 더 각성 효과가 좋은지 정보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발견한 으뜸은 레쓰비 캔커피였다. 하루에 캔커피 세 캔도 넘게 마셔가며 버틴 날들도 있었다. 힘에 부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하루를 버텨냈기 때문이다.
24살이 되었을 때, 나는 건강에 이상을 느꼈다.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설사를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서 검진해 보니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 그랬다. 딱히 완치할 방법은 없었다. 김치가 주식인 한국에서 고춧가루를 못 먹는다니. 더구나 매운 음식을 잘 먹고 또 좋아하던 나에겐 저주 같았다. 나는 30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매운 음식을 먹으면 설사를 한다. “넌 그럼 뭘 먹고살아?” 친구들은 묻곤 한다. 나는 청년이 아닌 노인처럼 음식을 먹는다. 된장찌개, 생선구이, 상태가 좋을 땐 고기구이. 매운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을 땐 설사할 각오를 하고 먹는다.
나는 더 이상 커피도 마시지 못한다. 이 또한 바로 설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허락된 최고의 각성제는 녹차다. 어른이 되어도 할 일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녹차만으로 버티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의 원인은 여러 가지라고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위장을 통과하던 어마어마한 양의 커피를 생각해보곤 한다. 어떻게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덜 자고, 때로는 밤을 새웠을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몸이 고장 나기 마련이지만, 24살은 내가 느끼기엔 이른 나이였다.
내가 지새운 수많은 밤들은 고춧가루와 커피를 잃을 만큼 가치가 있었을까? 분투하던 지난날들은 이따금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던 때도 있었지’하며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고등학교 때 만든 오답노트들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 없이 김치찌개를 먹고 커피를 마시던 날들도 그립다. 내가 나의 미래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진 않았을 것 같다. 커피는 몰라도 한국에서 김치찌개를 잃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표지 사진 출처]: 사진: Unsplash의 Erin Agius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aNgdv089D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