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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린 Oct 16. 2023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하곤 했다. 그 대상은 주로 우리가 길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손가락 끝에 있는 사람들은 본인의 삶을 책임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릴 적 나는 어른들의 손가락 끝에 서있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그 손가락 끝에 서려있는 멸시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들 말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꿈을 가지든, 공부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괴상한 믿음은 대치동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외고 입시를 준비할 때 우리는 영어 공부의 일환으로 팝송 가사를 듣고 받아 적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노래도 그중 하나였다. 이때 우리는 “The winner takes it all(승자는 모든 걸 가진다) / The loser standing small(패자는 구석에 초라하게 서있다) / Beside the victory(승패를 떠나서) / That’s her destiny(그게 그녀의 운명이다)” 이런 가사를 받아 적었다. 본래 이 노래는 사랑에 대한 노래였다. 하지만 학원 선생님은 이 노래를 외고 입시에 빗대며 승자와 패자에 대해 논했다. 나는 가사를 받아 적으면서, ‘구석에 초라하게 서있는 패자’가 되기 싫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내 태몽이 얼마나 비상했는지 이야기해주곤 했다. 집에 신비하게 생긴 동물이 들어왔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보면서 감탄하고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장차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한동안은 엄마의 기대에 걸맞게 공부를 잘하고, 우수한 인재로 촉망받았다. 나는 나를 포함한 동년배 친척들 5명 중에서도 가장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엄마뿐만 아니라 온 친척들이 내가 아빠의 뒤를 이을 법조인이 되리라 기대했다.


그런 내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모두들 말렸다. 일단 법조인이 된 다음에, 취미로 글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난 도무지 법조인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쓴 소설을 스스로 직접 영문 번역하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 그때의 나는 소설 한 글자도 써보지 않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건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목표가 가져다주는 황홀함에 취해있었다. 당시에 고은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 수상 명단에 거론되었다가, 결국 수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탄식했다. 그 모습을 보며, 훗날 내가 만약 노벨 문학상을 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줄까 상상했다.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일이다. 글 하나 완성하는 것도 쩔쩔매는 내가 노벨 문학상이라니.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내가 부모님이 바라는 판사가 아닌 소설가를 선택한다면, 그만큼의 업적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른들에게 손가락질당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노벨 문학상을 타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공부를 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가면, 노벨 문학상을 언젠가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교내 문예 창작 대회에만 도전했고, 외부 문예 대회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내 문예 창작 대회는 시와 산문 부문으로 나뉘어 있어서, 나는 산문 부문을 선택한 후 수필을 썼다.


소설을 쓰기에는 공부가 너무 중요했다. 소설을 쓸 시간에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다는 건 시험을 보는 것과 달랐다. 시험을 보면 결과를 빠르게 알 수 있었다. 내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숫자로 명백하게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문예 대회에 도전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내가 공모전에 떨어졌을 때 몇 등인지, 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당선되려면 그 캄캄한 막연함을 견디며 하염없이 글을 제출해야 했다. 그 기다림을 참을 수 없었다.


막상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글쓰기는 뒷전이었다. 엄마는 항상 “우리 딸이 E대학 국제학부 다녀요,”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나는 엄마에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되는 기분이 좋았다. 소설 창작론 강의를 듣고 나는 소설 쓰기에 도무지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점점 소설가라는 꿈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겠다는 야심 찬 목표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더 이상 나의 학벌이 엄마의 자랑이 되지 못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다시 남들이 칭송할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나는 어른들의 손가락 끝에 자리할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수군거리곤 한다. ‘부모님이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도 로스쿨에 못 갔대’, ‘직장에 들어갔다가 금방 퇴사했대’, ‘지금 나이가 30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사회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대.’ 그 손가락 끝에 서린 멸시는 나를 움츠려 들게 한다. 나는 그동안 어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이쪽을 가리키기도 하고, 저쪽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만의 길을 가기엔, 그들이 가리키는 반짝이는 것들이 좋아 보였다. 그 찬사와 영광이 탐났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했고, 방황을 했다. 이런 나를 보고 그때의 어른들은 뭐라고 말을 할까? 공부는 했는데, 그들의 손가락 끝에 자리하게 된 나에 대해서 말이다.


[표지 사진 출처]: 사진: UnsplashVaibhav Sanghavi(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ISwt4yUHA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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