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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린 Sep 17. 2023

조용히 사라지는 아이들

우리나라 입시생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정해진 인생 단계가 있는 듯하다. 대학교 진학 후 전문직이 되거나 취업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 각 단계에 제 시간 내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입시가 치열한 동네일수록 그 시기는 이르다. 내가 살던 대치동은 유독 그 시기가 빨랐다. 중학생 때부터 외고 진학에 실패하면 연락이 끊기곤 했다. 이렇게 ‘사라진 자’들은 말이 없다. 아니, 하지 못한다. 능력 혹은 노력이 부족하다며 손가락질받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열심히 뒷바라지해 줬는데 그거 하나 못 이루다니.’라는 비난과 죄책감은 사라진 자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는 희망을 품은 새로운 어린아이들이 채운다.


대학교 입시는 특히나 많은 아이들이 사라지는 시기였다. 나의 소중한 친구 지현이도 그때 사라졌다. 지현이는 “그~린!”하며 끝음을 높여 나를 부르곤 했다. 그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현이는 나의 질문 짝꿍이었다. 우리는 수업 시간이 끝나면 선생님을 붙잡고 질문을 하곤 했다. 공부하면서 힘들 때, 편지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했다. 나는 작고 반듯한 지현이의 글씨체를 좋아했다. 우리는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서로 도의상 다른 멤버의 부인이 되기로 약속했었다. 나는 A의 부인, 지현이는 B의 부인. 키득거리며 함께 나누던 덕심과 위로는 치열한 입시를 버티는 힘이 되어줬다.




지현이는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 어느 대학을 합격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 길로 연락이 끊겼다. 대학 입시는 민감한 사안이라 섣불리 연락할 수도 없었다. 지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슬펐다. 지현이가 어느 대학을 가든, 어느 직업을 가지든, 나는 지현이와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19살은 인생을 판가름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목표가 전부인 줄만 알았다. 그 허들을 넘으면 성공, 아니면 실패. 허들을 피해 돌아가거나, 조금 늦게 넘거나, 허들을 부수는 방법도 있었는데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만 보였다. 넘거나, 넘지 못하거나.


문제는 또 있었다. 허들을 운 좋게 넘더라도, 또 다른 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허들은 내가 얼마나 준비되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시점이 되면 눈앞에 나타난다. 제때 넘지 못하면 주변에서 손가락질하기 시작한다. 왜 넘지 못하느냐고, 어서 넘어야 한다고. 내가 다리에 부상을 입었거나, 애초에 넘을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어도 그건 핑계 취급받기 마련이다. 그때쯤이면 별로 친하지 않던 사람들도 와서 물어본다. 허들은 넘었냐고. 잔소리 메뉴판과 어물쩡 넘기는 대답으로도 방어하지 못할 수준이 되면, 질문을 받는 사람은 깊이 숨어 들어갈 동굴을 찾게 된다. 잠시 피난처로 삼은 동굴에 그 사람이 얼마나 머무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전문직 도전 허들을 넘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이었다. 공부만 하라고 지원해 주는 감사한 환경에서, 결국 로스쿨에 입학하지 못한 게 죄송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나는데, 물을 들이부어도 용이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끔찍했다. 취업 이후로 잠시 동굴 속에서 나왔지만, 퇴사 이후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동굴은 더 깊어졌다.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게 싫었다. 누군가 나를 찾을 때마다, 나체로 그 사람 앞에 서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더 동굴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사람들이 싫은 것보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 부끄러운 나 자신을 빛 아래 노출시키는 게 싫었다.


여전히 대치동의 밤은 밝다. 밤 10시만 되면 도로에 자동차가 빽빽하게 들어찬다. 요즘 아이들은 영어 유치부에 들어가기 위해 레벨 테스트를 공부한다고 한다. 자국어를 익히기도 전에 외국어를, 그것도 시험을 봐야 한다니. 그 아이들은 몇 살부터 허들이 놓이게 될까? 그리고 그 허들은 앞으로 몇 개나 더 남았을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또 사라지게 될까. 사라진 사람들은 말이 없는 거리에서, 대치동은 여전히 발 디딜 틈이 없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아직은 동굴 속에서, 필명에 기대어 작게 이야기할 뿐이다. 눈앞에 계속 놓이는 허들이 힘들어서, 결국 동굴 속에 들어갔다고. 그리고 나보다 더 이른 나이부터 허들이 놓일 아이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 본문에 등장한 이름은 전부 가명입니다.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Blocks Fletcher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VBk1hYejq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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