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그린 Sep 13. 2023

도대체 끝은 어디인가

로스쿨 불합격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빨리 취업하라는 압박이 있었다. 나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취업 공고를 찾아봤다. 그러다 지방에 있는 X대학교 국제교류 부서 교직원으로 합격했다. 정년 보장된 정규직이었다. 부모님은 기뻐했다. 패자부활전에서 살아남은 것 같았다. 이제는 끝이길 바랐다. 돈을 쏟아부어도 전문직이 되지 못한 부끄러운 내가, 조금이나마 덜 창피한 자식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했다. 일 하면서 남는 시간에 글을 쓰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제야 조금 내 삶을 되찾는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날이 기억난다. 전임자는 퇴사하고 없었다. 내 옆 자리에 있는 분이 대신 인수인계를 해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너무 바빠 보였다. 잔뜩 표정을 찡그리고 일을 하고 있어, 질문을 하기에 눈치가 보였다. 나는 전임자가 남기고 간 인수인계서 몇 장을 뒤적이며 질문할 내용들을 정리했다. 전임자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냐고 팀장님에게 물어보니, "연락 안 될 텐데..."라고 말하며 핸드폰 연락처를 알려줬다. 처음에는 문자를 보내봤다. 그러다 한참 답장이 없어 전화도 해봤다.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임자는 그 후로도 쭉 소식이 없었다.




전임자가 퇴사하고 내가 들어오기까지 일주일 정도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그동안 일은 쌓여있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관계자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공백 기간 동안 그들은 이미 참을 대로 참은 상태였다. 나는 눈앞에 쌓여가는 일들을 처리하면서 허둥지둥 업무를 배워나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한 남학생이 전화 와서 항의를 했다. 내가 업무에 적응하는 사이, 장학금 지급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지금 제가 학생이라고 무시해서 안 주는 거예요?”라고 화를 냈다. 나는 업무 적응 중이라 지급이 늦어졌다고 양해를 구한 후, 서둘러 장학금 지급 과정을 물어물어 배웠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점점 업무에 적응해 나가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심각해졌다. 내가 맡은 주 업무는 해외로 교환학생을 가는 학생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불확실성 앞에, 학부모까지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이제 막 업무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들에 대응해야 했고, 각 부서에 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학생들은 이례적인 상황이므로 예외가 허용되길 바랐다. 반면, 부서들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막아섰다. 해외 대학들도 이제야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오고 가는 논의 속에 의사결정은 늦어졌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만큼 빠르게 상황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사방에서 나를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처음 겪는 재난이 불러온 혼돈 앞에, 나는 총알받이로 서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늪에 더 깊이 빠져들어가기만 했다. 본가에 찾아갈 힘도 없어 주말에는 누워만 있었다. 코로나19로 집단 모임도 금지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갈 수도 없었다. 건강은 갈수록 안 좋아졌다. 위경련에 시달리고, 혈변을 보기도 했다. 업무분장 조정을 요청해 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사하기 얼마 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일이 과도해서 담당자가 4명이나 교체된 전적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퇴사했다.


자취방의 다음 세입자를 구할동안, 지방에서 홀로 취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의욕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 퇴사 소식을 듣고 “오죽했으면 네가 그랬겠냐”라기보다는, 어떻게 1년도 버티지 못했냐며 혀를 끌끌 찼다. 교직원은 워라밸 좋다던데, 그 일도 못하겠으면 앞으로 뭘 할 수 있겠냐고 물은 사람도 있었다. 화가 불쑥 났지만, 금방 그들의 말이 내면화되었다. ‘그러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하며 힘이 빠졌다. 나는 너무 낡아버린 컴퓨터 같았다.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고철덩어리. 더 이상 나 같은 고물에 무얼 채워 넣기보다는 폐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죽기로 결심했다.


1주일 동안 맨 밥 조금과 물만 마셨다. 블라인드로 방을 다 가리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간간히 오는 연락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막상 죽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후회하면 어떡하지?’, ‘여기서 죽는다면 집주인에게 미안해서 어떡하지?’, ‘막내 동생이 많이 슬퍼할 텐데, 어떡하지?’하며 수많은 질문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아직은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동네에 있는 정신의학과를 찾아 약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힘들다는 마음을 알리고, 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 세입자를 구할 때까지 월세 손해를 봐야 했지만, 당장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Vera Davidova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rttN4VCSstc)

이전 05화 대학만 가면 끝이라면서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