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사는 아이에게 물었다
넌 언제 가장 불행했니?
Q : 아빠는 어떤 분이었어?
A : 아빠는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었어.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지. 세상에 아빠만큼 날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믿을 만큼.
Q : 그런 아빠가 열세 살에 돌아가셨으니 그때 불행했겠네?
A :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땐 아빠한테 사랑받았던 기억들로 버틴 것 같아. 친구들이 날 많이 챙겨주기도 했고.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어쨌든 상관없었어. 난 줄넘기를 잘해서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우리 반 부반장도 했었지. 아빠를 볼 수 없다는 건 슬펐지만 그때 난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Q : 그럼 중학교 때 장학금 받는 것 때문에 선생들이 눈치 주고 엄마가 맨날 화내고 할 때는 불행했겠네?
A : 학교 선생들이 날 싫어하고 눈치 주는 건 정말 짜증 났어. 하지만 상관없었어. 그들은 내게 그다지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엄마가 화내는 건 많이 힘들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엄마를 많이 화나게 한 것 같기도 해. 그때 내겐 내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행복했어. 그래서 그때도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Q : 그럼 상업고등학교에 갔을 때 불행했겠네? 가기 싫어했잖아?
A : 맞아. 상업고등학교는 정말 가기 싫었어. 그런데 상업고등학교는 시험 기간에만 조금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잘 나오더라. 인문계 애들 대입 준비로 힘들어할 때 나는 친구들이랑 놀러 다녔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뮤지컬 관람도 많이 다녔어. 그래서 그때도 불행했던 건 아닌 것 같아.
Q : 그럼 딸이라서 대학을 포기해야 했을 때는 불행하지 않았어?
A : 그때 난 언제나 아들이 우선인 엄마를 원망했어.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엄마도 그렇게 배웠던 거야. 외할머니는 '딸은 키워봤자 다 소용없어, 아들이 최고야.'라고 말하던 분이었으니까. 고등학교 졸업 후 들어간 회사는 일은 재미없었지만 상사와 선배들, 동기들이 참 좋았어. 그리고 그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내 적성에 딱 맞는 의상학과를 입학할 수 있었던 거잖아.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네.
Q : 그럼 아르바이트하면서 힘들게 대학 다닐 때랑 졸업하고 취업 안 됐을 때 좀 불행하지 않았어?
A : 무슨 소리야. 난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아르바이트도 재미있었고 공부도 재미있었어. 그때 나는 반짝반짝했었지. 졸업 후 취업이 어렵다는 걸 알았을 때의 좌절감이 엄청났지만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간절해지더라. 간절한 꿈이 있는 사람은 절대 불행하지 않아.
Q : 아니, 엄마가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해줘서 힘들었다며?
A : 그랬지. 취업 못하고 집에 있을 때 날 어찌나 한심해하던지,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면접을 다녔다니까. 나중에는 면접자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막 하면서 나를 어필했어. 그렇게 해서 디자이너가 됐으니 대충 일할 수 있겠어? 일도 엄청나게 열심히 했고 즐거웠어. 그때 난 힘들긴 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어.
Q : 뭐야? 난 네가 너무 불행하게 살아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 줄 알았는데?
A : 그러게... 난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엄마랑 사는 동안 불행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글을 썼어. 글을 다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난 불행한 적은 없었네. 그저 조금 속상하고 힘든 날이 많았던 것뿐이었어.
Q : 엄마는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
A : 우리 엄마는 정말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어. 한번 안된다고 하면 끝까지 안 되는 거였고 언제나 우리가 엄마 뜻대로 하길 바랐어. 그런데 지금은 좀 많이 변했어. 가끔 '사랑하는 딸~'하면서 전화도 하고, 뭘 자꾸 주려고 하고, 잘 삐지기도 해. 마치 소녀 같아. 그런데 말이야. 어쩌면 엄마의 진짜 모습이 이거였는지도 몰라.
Q : 엄마한테도 물어봤어? 엄마는 그때 불행하지 않았는지?
A : 내 기억에 엄마는 그때 매우 불행해 보였어. 그래서 물어보기가 겁났는데, 얼마 전에 엄마가 말했어. 그때가 좋았다고. 한복점 앞 문방구에서 아줌마들이랑 별거 아닌 음식을 나눠먹으며 수다 떨던 때가 행복했대. 정말 다행이야. 나만 행복했던 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