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보자
휴식이 늘고, 그래서 꼼꼼하게 장 볼 여유가 생기고,
요리 후 뒷정리를 천천히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삶이라면
쓰레기는 저절로 준다.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 / 오찬호 지음
새벽배송으로 받은 식재료를 정리한다. 그나마 전용 보냉 가방을 지속 이용하여, 커다란 종이박스나 스티로폼은 소모되지 않는다. 하지만 냉장/냉동 상품이 구분되어야 하는 만큼 냉동 상품은 별도의 커다란 종이봉투, 그것도 보충 종이를 가득 채운 부피감 있는 봉투 안에 드라이아이스 담긴 비닐과 함께 배송되어 온다. 나머지 냉장 식품은 다시 그것들을 담을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내게 시간이 풍족했다면, 식재료 배송 대신 장을 보러 직접 나섰을까. 준비해 온 장바구니 안에 최대한 포장을 줄인 채소들을 담았을까. 온도 유지를 위한 드라이아이스팩과 아이스팩도 불필요했겠지.
정수기를 쓴다. 주기적으로 필터를 교체한다. 더 커다란 주기적으로 기기도 교체한다. 그리고 이 기기는 내가 쓰고 있지 않은 시간에도 전력을 소비하고 있다.
내게 시간이 풍족했다면, 과거 우리 엄마처럼 커다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였을까. 여러 병에 소분해서 며칠을 먹었을까. 버리는 건, 우려냄을 다 한 보리 한 줌뿐. 보리는 자연으로 잘 돌아가겠지. 정수기 필터와는 비교도 안되게.
세탁기를 돌리고 나면 이제 내게 건조기는 필수다. 몇 년 전만 해도 건조기 없이 잘 만 살았는데, 이제는 저 커다랗고 뜨거운 기기에 흠뻑 의존하고 있다. 두 시간 내내 드라이기 돌리듯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며 젖은 빨래를 통통 돌린다. 이렇게 쉬우니 빨래도 덩달아 더 맘껏 한다. 건조기를 써 본 지 몇 년 되었지만 이 번이 벌써 두 번째 건조기다. 얼마 전 이사하면서 세탁실 크기에 맞게 새로 구입이 필요했다.
내게 시간이 풍족했다면, 예전처럼 스텐 건조대를 활짝 펴서 빨래를 하나하나 널었을까. 아니, 지금 집은 건조대 하나 펼 넓은 베란다가 없으니, 내게 햇살 잘 드는 커다란 창의 베란다가 있었더라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 모습처럼 마당 한편에서 옷들이 맘껏 햇빛 샤워를 할 수 있었더라면.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테이크아웃이 아니니 일회용 컵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았다며 위안해 봤다. 하지만 냅킨을 썼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페이퍼 타월을 썼다.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손이나 입을 닦을 소모품을 더 찾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시간이 풍족했다면, 그래서 매일 손수건을 챙기고 다시 그걸 빨아 잘 말리며 개는 여유가 있었다면. 그러고 보니 어릴 때는 손수건을 선물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종종 보곤 했는데, 요즘은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어른을 보는 게 귀하다. 나도 서랍에 몇 장 있는 그것들이, 내내 그곳에 있으니 말이다.
상상해 본다. 우리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 그 일을 줄일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면. 나의 많은 시간들을 기꺼이 내 삶을 내 손으로 돌보는 데에 쓸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람, 다른 기기, 다른 물건에 의존하는 일을 줄일 수 있을 텐데.
20층이 넘는 아파트의 중간에 살며 허공만 겨우 딛고 있는 삶 대신. 내게 우리 가족이 살 만한 땅이 있고, 그래서 마당이 있다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빨랫줄을 연결해 놓고 볕 좋은 날 기분 좋게 널어놓을 텐데. 커다란 이불도 마음껏.
그 마당에! 한편 작은 땅이 있다면, 흙이 있는 진짜 땅이 있다면! 상추도 오이도 방울토마토도 비닐이나 플라스틱에 담길 필요 없을 텐데. 건강에 좋은 것을 챙겨 먹느라 건강에 나쁜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을 텐데.
글을 쓰다 보니 우리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개발한 것들이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걱정하는 현실을 초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쁘니까, 편리해야 하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이 필요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기술과 시스템에 나도 매번 감탄하며 열광도 한다. 건조기에서 뜨끈 뽀송하게 말려진 빨래를 꺼낼 때면 더더욱. 어디 건조기뿐일까.
많이 갖기 위해 빠르게 많이 소비하는 우리들.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고, 종류 역시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에게 시간이 풍족하더라면. 살아갈 터전이 풍족하더라면.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더라면.
그러면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 많은 것들을 버리며 살지 않을 텐데.
답도 못 내리면서, 불편한 주제에 대해 써 본 이유는 그래도 써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읽고 느낀 게 있는 만큼, 일단 써봐야 하지 않나. 나의 생각이 더 많은 생각을 만나고, 그것이 의식을 바꾸고, 목소리를 내고, 좋은 방향으로 가길 바라는. 그걸 바라는 마음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이토록 미약한 바람이지만 담아본다. 손수건 한 장 정도는 챙겨 다니자고 결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