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2019년 11월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보고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후년 1월 말부터 확진자가 발생하였다. 결혼하던 2020년 2월 8일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코로나가 대유행하기 직전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식수 인원을 평소보다 낮춰서 준비했는데 예상외로 하객들이 밀어닥쳤다. 맞춰 놓은 음식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결혼식 내내 기계적으로 미소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실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축하해 주기 위해 어려운 걸음 해준 손님들에게 푸대접을 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서툰 생각과 행동이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마냥 좋았다. 처음 출발이 가져다주는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눈을 맞추고 걸음을 같이 하면서 더디게 다가와 준 행복을 그저 만끽했다. 달라붙는 어둠을 밀쳐내기라도 하듯 우리 안에서 밝은 빛이 발하는 것 같았다. 식 마치고 서둘러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신혼여행 중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핸드폰 벨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 완전한 도피가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시간 흐름에 따라 출발 직전, 도착해서 실제 휴양과 관광을 하는 시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순간, 이렇게 셋으로 나눈다고 했을 때 가장 짜릿한 시간은 역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소풍 떠나기 전날이 가장 설레듯 어떤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꽤 긴 비행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아내와 나 둘 다 판단형보다는 인식형에 치우친 성향이라 꼼꼼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혹 즉흥적으로 결정하기도 했고 계획 없이 떠나기도 했다. 아내는 평소에도 여행에 있어 대부분의 선택을 내게 맡겼다. 관광할 장소와 식당을 정하고 타임라인을 짜는 것은 늘 내 몫이었다. 간섭하지 않는 대신 대체로 만족하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 선택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귀찮아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하와이의 음식은 무난했다. 하와이는 본래 하와이 왕국이라는 독자적 국가였다가 미국에 합병되었다. 근대화 이후 플랜테이션 농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국가의 이민자들이 오면서 원주민의 요리 외에도 다양한 문화권의 요리가 자리를 잡았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동아시아계 이주민들이 많이 정착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요리와 폴리네시아 요리, 미국, 유럽의 요리가 혼합되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휴양지에 걸맞게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도 즐비해 매 끼니마다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여보, 드디어 하와이 맛집 지도를 완성했어." 며칠 굶은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현지 음식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내는 말했다. "오빠는 음식 얘기할 때 눈이 가장 초롱초롱한 거 알아?" "당연한 거 아냐? 삶을 향한 의지가 꺾이면 바로 식욕부터 떨어져. 음식에 대한 열망이 강할수록 건강하다는 증거야." 당당하게 대꾸하는 내게 아내가 또 말했다. "미안한데, 우린 그런 사람을 돼지라고 부르기로 했어."
노스쇼어의 파라다이스 같은 경관을 지나 카후쿠라는 지역에 다다르면 새우 요리를 파는 푸드트럭을 만날 수 있다. 지오반니 푸드트럭에서 파는 새우 요리는 올리브오일, 다진 마늘, 레몬 버터로 맛있게 볶아 쌀밥과 함께 나오는데, 아는 맛 같으면서도 그 감칠맛과 중독성이 어마어마하다. 마늘의 민족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는 맛에 그 요리법도 간단해서 집에서 가끔 해 먹곤 했다. 신혼여행에서 갔던 식당 중 유일하게 두 번 방문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식 해물찜을 파는 '키킨케이준'이란 곳이었다. 랍스터, 게, 킹크랩, 새우 등의 갑각류를 옥수수, 감자 등과 소스에 버무려 쪄내는 케이준 요리는 매콤짭짤한 양념이 자극적인 맛을 내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처음엔 일단 비주얼에 압도되는데 특이하게도 그릇이 아닌 봉지에 담겨 나온다. 해산물 자체의 질이 굉장히 높다. 요리 완성의 절반은 신선한 재료가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훌륭한 요리사의 시작은 좋은 식재료를 찾아내는 안목과 성심에서 출발한다. 살이 가득 차 있는 킹크랩과 던저네스크랩의 맛은 달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얼마나 맛있던지 여행의 막바지에 아내에게 한 번 더 가자고 졸랐다. 분명 속으로 돼지 같다고 생각했겠지. 혀의 감각이란 경우에 따라 다른 감각보다 더 또렷하게 각인되어 뇌리에 남는다. 음식을 향한 욕망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원초적 갈망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을 감고 신혼여행을 떠올리면 어둠이 내린 밤, 트롤리버스 2층에서 맞닥뜨린 상쾌한 공기가 생각난다. 동시에 알라 모이나 센터에서 장을 본 후 먹은 시푸드 보일의 매콤 짭조름한 맛이 연상된다. 오하후의 화산인 다이아몬드 헤드에서 아내와 손을 잡고 맞이한 일출이 먼저 떠오르지만, 산 아래에서 맛보았던 말라사다 도넛의 달콤함도 동반 상기된다. 숨길 수 없는 설렘으로 아침을 열며 먹었던 무스비와 포케는 마치 행복한 하루의 애피타이저 같았다. 아내와 먹었던 스테이크, 아내와 먹었던 딤섬, 아내와 먹었던 수제 버거. 맛이 주는 즐거움, 바다가, 여유가, 하늘이, 여행의 모든 요소가 선사하는 기쁨 앞에는 '아내와'라는 단서 조항이 붙었다.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처음엔 혼자가 주는 고립과 자유를 누리다가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을 발견한다. '이런 멋진 경치를 혼자 보기 아깝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가족들과 찾아와 함께 먹어보고 싶은 식당이군.' 결국 철저하게 단일한 존재가 되는 과정은 동시에 누군가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반대로 타인과의 복잡한 관계 속 인간은 항상 홀로 되는 독립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여행 마치고 돌아와 조리법을 검색해서 시푸드 보일을 직접 해먹은 적이 있다. 올드 베이 시즈닝을 넣었더니 제법 비슷한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현지에서 먹던 맛까지는 아니었다. 일상에 지친 순간이면 '아내와' 함께했던 하와이 여행을 떠올린다. 영원을 약속했던 우리의 다짐, 끝이 안 보이는 바다가 펼쳐진 해안도로를 운전하며 나눴던 대화와 그 생기. 이틀 간 묵었던 터틀베이 리조트에서 만난 노부부의 뒷모습. 회상만으로도 불안과 근심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의 맛이 생각난다. 침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