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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Oct 23. 2024

망둥이 조림

망각

 아버지가 낚싯대 바늘에 갯지렁이를 달아 주었다. 가느다랗고 보드라운 갯지렁이의 입으로 바늘이 관통했다. 선홍색의 연약한 환형동물은 바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악하듯 몸을 흔들었다. 갯지렁이도 고통을 느끼는가. 태초부터 미끼의 역할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텐데. 유치원생이던 내게 낚시는 만만하지 않은 취미였다. 미끼를 바늘에 꿰는 일은 잡은 고기의 입에서 바늘을 빼는 작업에 비하면 수월한 편이었다. 미끈미끈한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는 순간은 끔찍했다. 하지만 더 무시무시한 건 바늘에 꿰뚫린 주둥이에서 도로 바늘을 빼내는 작업이었다. 바늘은 걸려든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뾰족한 갈고리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 빼려면 입 부위가 찢길 수밖에 없었다. 미숙한 내 손놀림에 가여운 생선의 주둥이가 그만 너덜나버렸다. 일단 어찌어찌하여 낚아 올리기는 했지만 피를 흘리며 파닥거리는 생선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자 간의 취미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바다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동생과 나를 이따금씩 그곳으로 이끌었다. 모래사장과 갯벌은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위태롭게 옆으로 달리지만 재빠른 칠게와 뻘을 허들 삼아 통통 튀는 짱뚱어의 경주는 흥미로웠다. 파도가 부서지며 만들어내는 소리, 서해안 특유의 바다 내음, 백사장을 맨발로 밟을 때의 감촉, 한없이 넓은 바다가 주는 안정감. 바다에는 해로운 것이 없었다. 최초의 인간이 바다에서 식량을 발견하고 얻었던 안도감이 내게도 유전되었을까. 어쩌면 바다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곳에서만은 한없이 다정하게 돌변하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끼를 달거나, 낚은 고기의 입에서 낚시 바늘을 빼달라는 부탁에도 귀찮은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기력과 짜증은 썰물에 딸려 보내고 자상한 가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낚싯대를 들고 바다를 응시하던 아버지는 내내 평온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의 바다처럼 큰 파동 없이 잔잔했다. 펜팔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여중생처럼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했다. 그 고요와 안온함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첫 조과의 기억은 망둥이였다. 갯벌이 보이는 서해안의 바닷가에서 녀석과 처음 대면했다. 유독 대가리가 크고 못생긴 녀석. "망둥이처럼 잡기 쉬운 물고기도 없어. 그냥 빈 바늘만 보여도 무는 놈이야. 심지어 망둥이 살을 베어 미끼로 써도 낚을 수 있다니까." 바보도 잡을 수 있는 고기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그날 동생과 나는 어설픈 챔질과 함께 감격의 첫 수확물을 뭍으로 들어올렸다. "에계." 아버지는 씨알이 너무 작다며 바로 바다로 방생했다. 어지간한 크기의 대물이 아닌 이상 모두 바다로 돌려보냈다. 대가리만 크고 살이 적어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망둥이 조림의 꼬들꼬들한 식감과 감칠맛은 제법이었다. 해풍에 말린 망둥이에 무, 간장, 고춧가루 등을 넣고 조림을 해 먹으면 그 맛이 별미였다.

 낚싯대에 미세한 진동이 찾아오고 또다시 망둥이를 건져 올렸다. 머리에 흉물스러운 혹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버지는 환경 오염으로 인한 기형일 거라고 말해주었다. 바다를 향해 힘껏 던지며 외쳤다. "바보야, 다시는 잡히지 마."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있던 낚시꾼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남자의 낚싯대에 내가 놓아주었던 혹이 난 망둥이가 낚여 있었다.


 잠이 달아났다.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빛의 밝기를 확인해 본다. 아직 명도가 낮은 걸 보니 새벽 4시쯤 되었을 것이다. 의식이 몸을 지배하자 가장 먼저 근심이 찾아온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기분 나쁜 불안이 나를 잠식한다. 쉽사리 잠이 찾아오지 않는다. 잠깐씩 머물다가 홀연히 떠나던 불안이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붙어 다닌다. 스스로 병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수면 내시경을 할 때처럼 스르륵 잠이 찾아와 주면 좋으련만 잠은 끝내 찾아오지 않는다.

 

 사무용 컴퓨터의 모니터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맥없이, 아주 천천히 해야 될 업무를 떠올렸다. 순간 전력이 차단된 가전제품처럼 뇌에서 정전이 일어났다. '방금 뭘 하려고 했더라.' 몇 초 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면 원래 그런 것일까. 총기가 점점 흐려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우울감과 무기력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는 심리 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아둔한 본래의 모습을 찾아 회귀하는 중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다가 과거의 나 역시 억장 같이 높이 쌓아올린 걱정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토록 암흑 같던 시간을 어떻게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일까. 망각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더니. 망각 덕분에 자족하고 살 수 있었다. 근심거리는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성난 아귀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삶은 각양각색의 사건으로 분주했고, 적당히 시달리다가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머리에 혹이 난 망둥이가 떠올랐다. 놓아줬는데도 다시 미끼를 문 미련한 물고기. 자기 살을 베어 미끼로 쓴 줄도 모르고 입질을 하는 멍청이. 그리고, 헤어나올 수 있음에도 근심에 파묻혀 자포자기한 아둔한 인간이여. 망둥이의 한자가 당연히 '잊을 망'을 쓴다고 생각했다. 낚시 바늘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그새 잊고 또 미끼를 문다고 붙은 이름인 줄 알았다. 망둥어의 한자 어원은 바랄 망(望)을 쓰는데, 툭 튀어나온 눈으로 멀리 바라보려고 애쓰는 모양이라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근심과 대적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대면하면 할수록 더 깊이 매몰되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다른 무언가에 시선을 돌려 간절히 몰두할 때 근심을 쉽게 떨굴 수 있었다. 망둥이가 말했다. "바보야, 다시는 근심에 사로잡히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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