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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Nov 19. 2024

육포

피그말리온 효과

 그 아침의 공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적당히 사늘하면서도 춥지 않은 온도. 거실 깊숙한 곳까지 비집고 들어오던 햇살. 모든 것이 내가 원한 루틴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던,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 유독 꿀 같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거울에 비친 얼굴부터 확인했다. 어찌된 셈인지 밤사이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간혹 야식을 먹고 자거나 늦게 일어난 날에는 눈이 금붕어처럼 퉁퉁 부었다. 갸름한 턱선과 오뚝한 콧날, 부리부리한 눈. 얼굴 컨디션이 유독 좋은 날에는 없는 일정을 만들어서라도 외출을 감행해야 했다. 일찌거니 아침을 먹고 나서, 그가 새로 산 식품건조기로 수제 육포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육포를 직접 만들어 술안주로 먹곤 했다. 소 우둔살을 얇게 저며 핏물을 제거했다. 양조간장과 설탕, 맛술과 생강, 그리고 후추와 월계수 잎을 넣은 소스에 고기를 재웠다. 건조기를 통해 재탄생한 육포는 눅진함과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좀처럼 감정 표현을 안 하는 그는 술만 마시면 수다쟁이로 돌변했다. 술이 삭막한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란 현실은 못마땅했지만 그마저도 내겐 감지덕지였다. 아이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내리 꺼내놓는 그의 천진한 눈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중학교 교사인 그가 학생들에게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해 가르친 얘기를 들려주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일이 잘 풀릴 것으로 기대하면 잘 풀리고, 안 될 것으로 기대하면 안 되는 경우를 모두 포괄하는 자기 충족적 예언과 같은 말이었다.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 갈라테이아라고 이름 짓는다. 세상의 어떤 살아 있는 사람보다 아름다운 여인상을 사랑하게 되는데,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 간절함에 감명하여 여신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가 학생들에게 했다는 설명은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던 음식이 바로 육포였어. 언제나 간절한 마음으로 육포를 원하셨지. 소고기로 육포를 만들어드리곤 했는데, 갑자기 돼지고기 육포가 드시고 싶다는 거야. 그리곤 말하셨지. 얼른 가서 돼지고기, 그, 피그 말리온나." 연기까지 곁들여진 그의 우스갯소리에 학생들이 눈물까지 흘리며 박장대소했다고. 그런데 정말 간절하게 원한다고 이루어지나. "실험 대상자들에게 쥐를 통한 미로 찾기 실험을 시켰는데 쥐가 미로를 잘 빠져나오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간의 차이를 찾을 수 있었대. 전자는 실험 대상자들이 쥐를 정성을 다해 키운 반면, 후자는 쥐를 소홀히 취급했다고 해. 쥐에게 거는 애정과 기대도에 따라 결과값이 달라진다는 거지." 그가 건넨 육포를 뜯으며 홍조를 띤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기분이 좋은 건지, 초조한 건지 아침부터 캔맥주를 네 개나 마신 그에게 묘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주말인데 공원에라도 나갈까?" 안 그래도 나가자고 조를 참이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고른 옷이 얇다며 두툼한 겨울용 새 옷을 권해주었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이 더디게 오더니 독한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좀 추우면 어때. 당신 품에 폭 안기면 되지. 그는 가방에 이것저것 쑤셔넣고 덜렁덜렁 문을 열었다. 바람이 매섭긴 했지만 한낮의 태양은 제법 강렬해서 포근하게 느껴졌다. 공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그룹을 이뤄 러닝을 하는 사람들. 아이와 산책을 나온 부부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돗자리에 누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해를 올려다보던 그가 말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 바로 태양인 거 알아? 태양이 주는 빛 에너지가 없으면 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없고 육식 동물도 살 수가 없어. 태양의 중력이 사라지면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를 잃고 우주 공간으로 떠돌아다니게 된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라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양이 사라지면 지구는 극한의 환경으로 변하듯 그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도무지 숨기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감정 표현이 한 잔의 물과 같다면, 한 모금씩 천천히 목을 축이지 못하고 성급하게 원샷해버리는 셈이었다. 도저히 해갈되지 않는, 애정을 향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언제나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그의 주위를 빙빙 돌고 싶었다.

 태양도 수명이 존재해서 언젠가는 소멸해 버릴 거라고 설명하던 그가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술을 좀 적당히 먹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마주 오는 자전거의 그림자를 뛰어넘는 놀이를 했다. 어렸을 때는 여간해선 그림자를 밟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날카로운 그림자에 발목이 수십 번은 잘렸다. 동강난 그림자는 검은색 피를 흘렸다. 그가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 육포를 먹었다. 육포는 단단해서 오래 입에 넣고 질겅일 수 있었다. 아무리 씹어도 짠맛은 사라지지 않고 입에 맴돌았다. 마치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 먹으라고 만든 음식인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계가 없고, 시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기온이 떨어지는 것으로 밤이 온 것을 인식할 뿐이다. 지구의 자전 운동으로 인해 내가 밟고 있는 땅이 태양 빛을 받을 수 없는 쪽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이제 육포마저도 다 떨어지고 허기만 남았다. 이렇게 오래 돌아오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가 의도적으로 나를 두고 떠났을 가망과 불의의 상황 때문에 오지 못할 거란 희망 사이를 서성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아까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네. 주인이 버리고 간 거 아니야?" 누군가는 가엾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모든 현상에는 징조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시간을 역순으로 돌려가며 버려짐의 조짐에 대해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조금 더 유심히 관찰했다면 평소와는 미세하게 다른 점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왜 육포를 실컷 먹게 해 주었는지, 새 옷을 입혀 산책을 내보냈는지, 불안한 눈으로 아침부터 낮술을 들이켰는지 조금만 의심하면 수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가 웃는 것에 몰두하다가 다 놓쳐버린 내 잘못이었다. 늙고 병든 개는 언제든 유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어야 했다. 운수 좋은 날이란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더라면 외출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까. 빛이 먼저였다가 어둠이 생긴 것이 아니다. 우주는 본디 어둡고, 공간은 차갑다. 그곳에 빛과 열이 있는 것이다. 낮에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를 원망할 겨를도 없다.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이 자리에서 그대로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분명 그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가 애정과 기대를 갖고 길렀다면 내겐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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