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환학생 생활에 큰 영감이 된 <이탈리아 기행>을 쓴 괴테는 ‘노력하는 인간은 헤매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엄마의 좋은 아들이 되고자 나름 내 딴에는 노력한다고 생각하는데, 좀처럼 계속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어젯밤, 엄마와 전화로 소리 높여 언쟁했다. 엄마의 시간으로는 새벽이었다. 그냥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어드리기만 해도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은 못 돼먹은 아들인지.
2. 입맛은 없고, 김밥 생각이 난다. 나는 김밥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어느 정도냐면 고3 수능 때, 친구들은 거의 다 죽을 싸 왔는데, 나는 김밥과 닭갈비를 싸 갔다. 집 앞 에셀룽가 마트에 가니 김밥 한 줄에 18유로다. 처음에는 ‘2,600원 정도 하겠거니. 싸네. 두 줄 살까?’하고 카트에 담았는데, 계산대로 가며 생각해 보니 18유로면 2만 6천 원 정도 하는 거다. 물론 김밥에 연어도 들어가 있고 뭐 맛있어 보이는데, ‘두 줄에 5만 2천 원?!’ 이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초밥과 김밥을 파는 칸에 다시 내려놓았다.
3. 아니지, 고이 원래 자리로 바래다 드렸다. 내가 얼마 전에 가입한 대학교 영화 동아리 채팅방에 이탈리아에선 김밥이 뭐 이리 비싸냐고 물어보니까 친구들이 원래 김밥과 초밥이 여기선 아주 특별한 날에 먹는 고급 음식이란다. 친구들은 내게 한국 음식이 그립냐며, 그럴 때일수록 이탈리아를 즐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밀라노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에 맛있는 빵집과 카페 리스트와 함께 거리 지도를 보내줬다. 그래, 산책도 할 겸 가보자. 갖가지 빵들이 눈길을 끌었고, 거리 곳곳은 맛있는 빵 냄새로 가득 찼다.
4. 계속 빵집을 지나가며 걷다가 엄마가 생각났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엄마가 밉기도 했고, 나도 참 못됐다.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멈추지 않고 걸으며 혼자 조용히 계속 눈물을 닦으려는데 손에도 힘이 풀렸고 가슴에도 큰 금이 갔다. 엄마도 분명 힘드신 게 있으시겠지, 어제 통화할 때 내 입장에서의 답들이 머리에 막 드러났고 이를 내뱉었는데, 더 큰 압박과 무게로 나를 다시 누른다. 죄송스럽다. 그러다 매대에 놓여있는 '파네토네(Panettone)'를 보고선 내가 모른 척 덮어둔 기억과 사랑이 생각났다.
▲ 이탈리아 나폴레오네 거리 명품매장 쇼윈도에 전시된 ‘파네토네’
파네토네는 이탈리아에서 크리스마스나 신년에 먹는 전통 빵이다. 1495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의 궁정에서 하인 토니(Toni)가 개발했다고 한다. 요리사가 실수로 크리스마스 푸딩을 태워버렸지만 토니가 즉석에서 건포도, 설탕, 견과류를 넣은 빵을 구워냈고, 그 이후로 이 빵은 밀라노의 상징이 됐다. 아직 연말까진 시간이 있는데, 가족 단위로 빵을 먹는 행복한 모습이 보인다.
5. 기분 좋은 포근한 빵과 바닐라 향, 그리고 설탕이 달궈진 달콤함이 잊어버렸던 과거를 머릿속에 또렷이 떠올리게 했다. 내가 세상에 나오고서 조금 이따 아빠는 IMF의 여파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 당시엔 탄탄한 대기업에서도 월등한 전문성과 특출 난 능력이 없으면 대부분은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좋은 기업에 잘 다니시다 모든 안정이 깨졌으니, 두 분은 하루아침에 얼마나 당황스럽고, 사랑하는 아기를 두고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그래서였을까. 당시엔 학원 셔틀버스가 오지도 않는 외곽의 집에 살았지만, 엄마께서 시내에 있는 영어학원에 등·하원을 시켜주셨다. 학원 친구들은 대게 당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혜택을 누리는 중산층 집안의 자녀들이었던 것 같다.
6. 언젠가 학원에서 영화 파티를 개최할 것이니 간식거리를 가져오라 했다. 초등학생이던 나의 가슴은 참으로 설레었다. 이윽고 기다리던 영화 파티 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하나씩 간식거리를 꺼냈다. ‘스타벅스 케이크, 파리크라상 빵’, 나의 가방 안엔 마라톤 행사에 참여하면 주는 차가운 도시락통이 있었고, 그 안엔 김밥이 들어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도시엔 스타벅스가 딱 한 군데 있었고, 음료와 케이크값도 보통 카페에 비해 꽤 비싼 편이었다. 어렸던 나는 창피해서 가방을 닫고,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7. 얼른 이 한 시간 조금 넘는 영화가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집으로 가니 엄마가 가방을 열어보시곤 왜 안 먹었냐고 하셨다. 나는 그냥 배탈이 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확히 2주일 뒤에 학원에서는 영어 동화를 읽을 것이니 또 간식을 가져오라고 했다. 속으론 이제는 차가운 김밥도 당당히 먹을 수 있다고 다짐하며, 겉으론 친구들에게 난 밀가루 알레르기 있어서 빵을 잘 안 먹는다고 말했다. 용기를 내 가방을 열어보니 ‘파리바게뜨 빵’과 ‘스타벅스 블루베리 빵’이 가득 있었다.
8. 나는 눈물이 나왔고, 도저히 이 빵을 꺼낼 수가 없었다. 차마 이걸 내가 혼자서 맛있게 먹을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니 엄마는 가방을 열어보고서 다시 물으셨다. 나는 또 배가 아프다고 이야기하려다 엄마의 눈을 보고선 또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늦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시고서 우리 가족은 다 같이 그 빵을 맛있게 먹었다. 아빠는 자꾸 빵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내게 왜 우냐고 물어보셨지만, 난 말하지 못했다. 그냥 그때 유행하던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주인공 상황이 너무 슬프다고 둘러댔고, 아빤 내게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칭찬해 주셨다. 내 기억 속에, 그날 먹은 빵은 내 생에 가장 맛있는 눈물 젖은 빵이었다.
9. 왜 맛있었을까?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어서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진부하디 진부한 단어에 답이 있다. 그것은 ‘가족의 사랑’ 때문이었다.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일기에 쓰기도 참 부끄럽고, 그 말에 너무나도 많은 얼룩이 묻어서 이제는 새삼스러운 단어가 됐다. 우리 가족. 우리 가족은 이제 걱정 없이 후식으로 비싼 케이크를 배 터지도록 먹을 여유도 생겼고, 지역 사회와 지구 건너편에 있는 아이들에게 꾸준히 기부하고 봉사도 했다.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별처럼, 아픔을 통해서 느낀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감정이 아닐까 싶다.
10.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지만 대충 닦고 제과점에 들어가 빵을 먹었다. 빵을 먹는데 갑자기 또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왔다. 동네 빵집이 보통 그렇듯 사장님으로 보이는 제빵사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내 테이블 앞까지 와서 왜 우냐고 물었고, 나는 정말 맛있어서 운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내게 커피를 서비스로 주셨다. 괴테님, 저는 이제 인생에 대해 조금은 논할 자격이 주어진 걸까요? 이 눈물 젖은 빵들을 집에 갈 때 가져가서 가족과 함께 그때를 얘기하며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주변에 옆에 있는 ‘코바(Cova)’라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11. 코바는 밀라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헤밍웨이의 대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속에서 카페 코바는 주인공이 여자친구인 캐서린에게 줄 초콜릿을 포장했던 장소로 등장한다. 소설에는 “코바에 들어가서 캐서린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었다. 여직원이 포장하는 동안 바를 바라봤다”라는 글이 있는데, 나는 코바에 들어가서 가족에게 줄 초콜릿을 사고 싶었다. 직원이 포장하는 동안 저절로 엄마께 드릴 편지의 내용들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