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과 이탈리아, 밀라노 바선생의 힘과 감정관리
1. 학교에 가기 전, 전기 모카포트 버튼부터 눌렀다. 쏟아지는 졸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구수한 커피 향이 잠을 깨웠다. 오늘따라 커피 향이 더욱 진해, 다 따라서 마셨다. 마지막 커피 한잔을 독배처럼 비우는데 뭔가 입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지?’ 뱉었는데 뜨끈한 바퀴벌레 사체였다. 그렇게 커피 향이 묵직하던 커피는 바퀴벌레를 삶은 커피였던 거다. 나는 내가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구나 싶은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거의 원효대사 해골 물 수준이었다. 이미 다 삼켰기에 억지로 뱉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은 흔들리지만 편안한 이 침대가 1인용 병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나 바로 집 앞 약국으로 뛰어갔다. 자기 전에 내가 바닥에 모카포트를 내려놨는데, 아마 그때를 틈타 바퀴벌레가 안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다.
2. 집주인이 내가 사는 집은 100년도 더 된 집이라 곤충이 나올 수 있다곤 했는데, 바퀴벌레라니…. 약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약사가 약국을 10년 넘게 운영 중인데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확실히 삶았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직도 그 삶은 온기가 깃든 바퀴벌레 사체를 약사에게 보여주니, 약사가 삶았으니 괜찮단다. 또, 너는 바퀴벌레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더 면역체계가 강해질 것이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그 말에 약간 힘이 났다. 뭐 큰 이상은 없을 테고, 지금 아니면 이런 경험도 언제 해볼까 싶어 흥얼거리며 학교로 갔다. ‘누구는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는데, 나는 바퀴벌레 모닝커피를 마셨다. 게임 끝 아닌가? 못할 게 뭐 있을까?’
3.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자극은 어떤 색채도 갖고 있지 않지만, 감정은 자극받은 당사자의 마음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감정이 생기고 사라지는 일은 내가 쉽게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나는 일이 벌어지면 최대한 내게 유리하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게 여유 있게 일상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몸과 마음을 흥분시키고 평상심에서 멀어지게 한다. 어제 화이트헤드 짜는 방법을 검색하다 읽게 됐는데,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우리 일상의 90%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마다 정도의 어느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감정이 우리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확실히 세다.
4. 학교에 와 조별 회의하는데, 다른 한 남자애가 나에게 다가와 껌을 하나 먹으라고 건넸다. 아직 바선생으로 인해 찝찝한 입을 상쾌한 껌의 향으로 덮을까도 했지만, 나는 난생처음 보는 그의 호의가 부담스러워 됐다고 거절했다. 그 애는 쉬는 시간이 되자 아예 살림을 차릴 작정인지 가방을 풀고 우리 조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한국은 부자 나라고, 노래랑 드라마는 정말 유명하지만, 사실 박물관이나 예술, 역사 뭐 이런 면에서 크게 자랑할만한 건 없지?” 처음에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이 기분은 곧 짜증으로 치환되었다. 태권도가 있다고 하면서 이단 옆차기를 꽂아버릴까도 싶었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웃으며 답해줬다.
5. ‘자랑할만한’이란 단어를 쓴 걸 보니, 얘는 자기 걸 인정해주면서 말하면 바로 알아들을 타입일 것 같았다. 내 피에 흐르고 있는 바선생의 일부가 그랬다. “그래, 문화 선진국인 이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 역사와 예술, 문화가 대단하잖아. 나도 그게 좋아서 너희 나라로 교환학생을 온 거고!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이 자랑할만한 게 있다면, 우리가 남들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강한 나라가 된 게 아니라는 거야. 이탈리아도 대로마제국이었잖아. 나중에 서울 한번 와. 국립중앙박물관도 있는데 너처럼 트렌디한 애들도 아마 좋아할 것 같아. 남의 나라 걸 빼앗거나 훔친 게 아니야. 또, 이탈리아랑도 분위기가 사뭇 다를 거야.” 그 남자애는 나중에 한국에 꼭 갈 거라며 팔자걸음을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6. 쉬는 시간이 끝났고, 대기업 홍보팀에서 국가별 예절에 관해 특강을 했다. 국가별 식사 예절에 관해서도 다뤘는데, 한국에서는 식사 후 부를 노래방 번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Be prepared to sing a solo karaoke number after dinner (저녁 식사 후 솔로 노래방 번호를 부를 준비를 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수업에 참석한 전원이 놀랐고, 그 강의실에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이탈리아 학생들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눈짓하며 연신 강의 자료 사진을 찍었다. 강사는 너도 노래방 번호가 준비돼 있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이 음악 과제 A 받아보는 거였다고 미리 경고한 후에, 그렇게 나는 2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이탈리아 국민노래인 Felicita(행복)을 두 소절 불렀고, 대 환호를 받았다. 아까 내게 껌을 권했던 그 남자애가 제일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제는 거의 소화가 되었을 바선생의 영혼도 흐뭇해하는 것만 같았다.
7. 인간은 마음 상태에 따라 같은 자극에도 저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면 별거 아닌 것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마 내가 오늘 바퀴벌레 커피를 마신 걸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말을 왜 그렇게 하냐며 그 친구와 언성을 높였을 수도 있다. 또, 노래를 할 수 있냐고 강사가 물었을 때, 분위기를 싸하게 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싸움은 결국 소모전이니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되받아치되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 유머는 유머로 받아쳐 한번 웃고 난 뒤 부드러워지면 모두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감정에 당황하고 본의 아니게 끌려가지 말자. 감정의 힘은 강하되, 제대로 인식하면 잘 관리할 수 있다.
8. 무슨 일이 있던 생각하기 나름이니 좋게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그저 나의 원칙에 근간을 두고 행동하자.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들과, 수많은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내게 어떤 자극을 줘도 그것에 대한 반응은 역시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바선생 커피로 놀란 위를 식초와 매운 중식으로 소독하고 재정비할 핑계로 Moscova역 부근 차이나타운 중식당에 친구와 밥을 먹으러 왔다. 식사를 다 하고 포춘쿠키를 뜯었는데, 그 안엔 중국 속담이 영어로 적혀있었다.
“You can't keep the birds of sadness from flying over your head, but you can keep them from nesting in your hair. (슬픔의 새가 머리 위로 날아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너의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