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문이 열렸는데 아무도 안 탄다. 시야를 가리는 사람이 없으니 승강장 벤치에 앉은 사람이 열차 안에서도 잘 보인다. 그는 딱 봐도 집에 갈 생각이 없다. 벤치에 다리 꼬고 앉아 허벅지에 올린 책을 읽는 중이다.
그와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벤치 앞을 지나가다, 그를 불러 인사했다. 사복이 아니라 유니폼인 모양이다. 둘은지하철에서 교대로 근무하는 것 같다. 책 읽는 남자가 하던 일을 인사하는 남자가 이제 막 넘겨받았다.
일이 끝났는데 집에 안 가고 뭘 할까. 마침 그가 나에게서 사선 방향으로 떨어져 있어, 넘어가는 책장이 내게도 보였다. 흑백의 명암이 가득한 이미지였다. 언뜻 네모난 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알기로 먼거리에서 그렇게 보일 만한 건 흑백 만화밖에 없다. 퇴근하고 나서 집에 안 가고 몰두하며 읽을 만한 것도 만화책 뿐이고.
나 어릴 땐 놀이터 구석에 앉아 만화책을 들여다보는 애들이 간혹 있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 책가방에 넣어온 걸 꺼내 읽는 거였다. 오래전 그도 이런 아이였을 거다. 나이 먹고 키가 커 이젠 다리도 제법 근사하게 꼬지만, 그는 여전히 집에 안 가고 벤치에서 만화책을 읽는 사람이다. 놀이터가 근무지로 바뀌었을 뿐,동심은 습관으로 남는다.
어쩌면 우린 돈 버는 어린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애가 개발새발 그린 것 같은 그림과 시시한 말장난, 읽고 싶은 만화책을 뒤에 숨기고 어른인 체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