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바놀이 다크초콜릿으로 둔갑한 건에 대하여
※이 글을 읽으면...
1. 기사의 왜곡을 매번 다 찾아내진 못하더라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독해하는 독자가 될 수 있다
다크초콜릿을 먹으면 정말 기억력이 좋아지는 걸까?
아래의 기사들은 모두 동일한 연구 결과를 보도하는 기사다.
"다크초콜릿 먹으면 기억력 증진 효과" (한국경제)
"다크초콜릿 먹으면 기억력 증진 효과...노인들에 도움" (YTN)
'초콜릿 여섯조각'의 놀라운 비밀..“노인 기억력 증진 효과 있다” (파이낸셜뉴스)
초콜릿 몇 조각 먹었더니 생긴 놀라운 변화 (주간조선)
건강 관련 기사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보로부터 ‘이렇게 해야겠다’ ‘이건 하지 말아야겠다’는 당위성을 도출한다. 이 기사들의 헤드라인만 보면, 기억력을 지키기 위해 다크초콜릿 또는 초콜릿을 먹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래는 같은 논문을 보도한 다른 기사들이다.
‘이 성분’ 부족하면 노화 관련 기억력 감퇴 (코메디닷컴)
차·사과·베리에 풍부한 플라바놀…"노인 기억력 감퇴 개선 효과" (동아사이언스)
플라바놀 결핍, 노년기 인지 장애와 연관...적절한 보충이 필수 (메디컬투데이)
첫 번째 기사 집단과 두 번째 기사 집단에서 기억력 개선 효과가 있다고 제시한 게 다르다. 첫 번째에선 다크초콜릿, 두 번째에선 플라바놀이란 성분이다. 논문을 읽어보면 노인 기억력 감퇴 개선 효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건 플라바놀이다. 애초에 기억력을 비교하는 실험 참여자들에게 먹인 게 '플라바놀 보충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문 원문에 다크 초콜릿 내지는 초콜릿이란 단어가 나올까? ctrl+f 키를 눌러 키워드 검색을 해 보면 ▲chocolate ▲dark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단 게 확인된다.
코코아(cocoa)가 언급되긴 한다. 이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먹인 플라바놀 보충제의 플라바놀이 코코아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코아 플라바놀(cocoa flavanols) ▲코코아 추출물(cocoa extract) ▲코코아에서 추출한 식이 플라바놀(cocoa-extracted dietary flavanols) (식이요법 할 때의 그 ‘식이’다)이란 말이 나온다.
이런 연구결과는 보통 외신을 통해 먼저 보도된 후, 국내 기자들이 외신 보도 내용을 번역한 기사로 국내에 보도된다. 찾아보니 다크초콜릿이 가장 먼저 언급된 기사는 5/29(현지시각) ‘더 가디언(The guardian)’에 실린 “Tea, apples and berries could stave off age-related memory loss, study suggests(차, 사과 그리고 베리가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소를 막아준다는 연구 결과 발표)”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름이 “애딘 카시디(Aedin Cassidy)”인 교수의 발언에 다크초콜릿이 언급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수의 말이 ‘다크초콜릿을 먹으면 기억력이 증진된다’는 뜻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플라바놀을 일상 속에서 섭취할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이 교수의 말에 의하면 ▲차 한 잔 ▲다크 초콜릿 여섯 조각 ▲사과와 베리류 과일 두어개를 먹을 경우 도합 500mg의 플라바놀을 섭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도합(together) ’이다. 기사 헤드라인에선 다크초콜릿 6조각이 주구장창 언급되지만, 실제로 다크초콜릿을 이정도 먹는다고 플라바놀 500mg이 다 섭취되는 게 아닌 거다. 다크초콜릿 여섯 조각에 차 한잔과 사과, 베리류 과일까지 먹었을 때 플라바놀 500mg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게 교수의 말이기 때문이다.
가디언 기사의 제목까진 그래도 괜찮다. 본격적인 비약이 시작되는 건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 내보낸 5/30자 기사다. 포탈 검색용 짧은 제목이 “매일 먹는 다크 초콜릿 여섯 조각이 기억력 유지에 도움돼(Six squares of dark chocolate a day 'may keep the memory')”다. 클릭해서 들어가보면 “초콜릿이 기억력 소실을 막는 데 도움될 수 있다: 다크 초콜릿, 차 그리고 사과에 든 강력한 화합물이 뇌를 건강하게 유지한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 (Chocolate 'may help thwart memory loss': Powerful compounds in dark choc, tea and apples can keep brain healthy, study claims)”라는 긴 제목이 뜬다. 여기서 화합물이란 폴리페놀 화합물인 플라바놀을 가리킨다.
이 제목에서 ‘다크 초콜릿, 차 그리고 사과에 든 강력한 화합물이 뇌를 건강하게 유지한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Powerful compounds in dark choc, tea and apples can keep brain healthy, study claims)’라는 맥락을 지우면 ‘다크초콜릿 내지 초콜릿이 뇌 건강 유지에 도움된다’는, 정말 믿고 싶어지는 내용만 남는데, 이걸 그대로 번역해서 쓴 게 제일 처음 언급된 국내 헤드라인이다. 주구장창 말하고 있지만, 연구 결과에서 기억력 증진과 관련있다고 나온 건 플라바놀 500mg이지 다크초콜릿 그 자체가 아니다. '초콜릿 여섯조각'의 놀라운 비밀..“노인 기억력 증진 효과 있다”는 헤드라인은 상당히 과장됐다는 뜻이다.
게다가 플라바놀 500mg을 먹으면 뇌 해마의 기억력이 향상되는 결과가 모든 연구 참여자에게서 나타난 것도 아니다. 참여자들의 평소 식사의 질을 상, 중, 하로 나누었을 때, 하에 속하는 집단에서만 이런 상관관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나타났다. 단순하게 말하면 영양상태가 불량한 사람들에게서만 효과가 관찰됐다는 뜻이다. 영양상태가 부족한 사람에게 영양을 보충했더니 기억력이 나아졌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 그렇게 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연구 결과의 내용을 다 파악하고 나면, 기억력이 걱정되니 다크초콜릿을 먹어야겠단 생각은 별로 안 들 것이다. 그냥 평소 식단을 제대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라면 몰라도. 본문에서 가장 이목을 끌 만한 내용을 눈에 띌 만한 단어를 써서 헤드라인을 쓰면, 굳이 안 해도 될 결심(초콜릿을 먹어야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다크초콜릿 먹으면 기억력 증진 효과”는 나쁘게 말하면 사람을 낚으려고 단 제목이고, 좋게 말하면 약간의 과장과 비유가 첨가된 문학적 제목이다. 다크초콜릿에 플라바놀이 들었다는 점을 이용해서, 플라바놀을 숨기고 초콜릿을 내세운 거다. 물론 굳이 초콜릿을 내세워야 하는 이유는 없다. 차에도, 사과에도 플라바놀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나 사과는 그냥 딱 봐도 건강해보이는 식품이라 이걸 먹는 게 몸에 좋다는 게(기억력 증진) 너무 당연해 보인다. 조금이라도 안 당연한 게 사실이었다고 해야 사람들이 읽는다. 그나마 안 건강해보이는 게 여기선 다크초콜릿이다.
물론 헤드라인엔 원래 모든 정보를 쓸 수 없다. 헤드라인만 읽으면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A를 ~A로 받아들이는 것만 왜곡이 아니다. A를 B로 받아들이는 것도 왜곡이고, A라는 정보가 도출된 과정을 모른 채 A만 달랑 받아들이는 것도 때론 왜곡일 수 있다. 맥락을 알고 A를 해석하는 것과 맥락을 모른 채 A를 해석하는 건 천지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 결과를 전달하는 헤드라인을 쓸 땐 100% 정확하진 못하더라도(이건 어차피 불가능하니) 쓸데없는 왜곡을 유도하지 않도록 써야 한다. 앞서 언급한 기사 제목 중엔 “차·사과·베리에 풍부한 플라바놀…"노인 기억력 감퇴 개선 효과"(동아 사이언스)”가 그나마 가장 낫다. 우선 기억력 저하와 관련있는 게 플라바놀임이 드러나 있다. 먹으면 좋다는 뉘앙스는 풍기지만, ‘부족하면 기억력 감퇴’ ‘적절한 보충이 필수’ 따위의 말을 넣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은 안 든다.
이외에도 ‘뭐가 어디에 좋다’는 식의 연구 결과 보도 기사는 차고 넘친다. 적당히 걸러들으려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1)평상시에 골고루 잘 먹고, 잘 자고, 매일 운동하는 게 최고다 (2)‘이걸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식의 슈퍼푸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