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고 나면... 1.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자신의 생물학적 성이 자신의 정신적 성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몰라 그들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던 사람도 그들을 욕하지 않을 수 있다 2. 남성->여성 트렌스젠더에게도 질염이 생길 수 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소모적 싸움을 그만할 수 있다
심리철학 시간엔 고통이 자주 거론된다. 심리철학은 정신적인 것이 이 세계에서 지니는 존재론적 지위를 탐구한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마음' '의식' '정신'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무엇인가'가 몸처럼 '물리적인 존재'인지 알아보는 게 심리철학의 주제다. 사람의 마음은 뇌나 뇌 속의 신경망 같은 걸로 온전히 호환되지 않을 것 같다. 정말 그러한지 확신할 순 없어도,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게 우리 직관이다. 고통은 정신적인 현상의 대표격으로 등장한다. 고통이 정신적 현상이라면, 고통을 탐구해서 정신 현상 일반에 관한 앎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일반에 관한 연구가 개별 인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통이라는 정신적 현상이 일어날 때 활성화되는 뇌의 어떤 부위가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C 섬유(C fiber)라고 일컫는다. C 섬유가 활성화될 때마다 고통을 느끼고,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C 섬유가 활성화된다면, C 섬유는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고통에 대응되는 물리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C 섬유와 고통이 이토록 긴밀하게 관련됐다면, 고통을 '인간 뇌의 C 섬유가 활성화될 때 발생하는 정신적 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뇌에서 고통과 연결된 부위를 C 섬유로 퉁치는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은 고통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사실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고통에 대응되는 물리적 상관자'를 집어내겠단 아이디어 그 자체다.)
그러나 고통을 이렇게 정의하면 난처한 점이 생긴다. 물고기나 외계인에겐 사람의 뇌가 없다. 물고기에겐 물고기의 뇌가, 외계인에겐 외계인의 뇌가 있겠지만, 그것은 사람의 뇌와는 다르다. 즉, 사람 뇌의 C섬유가 물고기나 외계인의 뇌에는 없다. 인간과 물고기와 외계인은 인지 체계와 신경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을 'C 섬유가 활성화될 때 발생하는 정신적 현상'이라고 인간의 체계를 통해 정의하면, 물고기나 외계인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고통은 인간만의 것이 되고 만다.
물고기와 외계인이 빼앗겼던 고통을 되돌려준 게 '복수 실현 가능성'이다. 특정 정신적 상태가 하나 이상의 물리적 실현자를 가질 수 있다는 견해다. 쉽게 말해 고통이 인간의 뇌 말고, 물고기나 외계인의 뇌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뇌와 신경계에서 각자의 고통이 실현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선 고통의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 '고통은 ( )다'라고 정의할 때, ( ) 안에 인간에게서만 성립할 수 있는 무언가(ex. 인간 뇌의 C 섬유 같은)를 넣으면 안 된다. 위험을 회피하게 하고, 신체를 보존하게 하는 등… 고통이 다른 종들에서도 똑같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 또는 '기능'을 넣는 게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를 '기능적 정의'라고 한다.
철학자들의 이러한 작업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첫째, 우리는 대상이 무엇인지 정의함으로써 그 대상을 이해하려 한다. 둘째, 그 정의는 고정돼있지 않다. 대상에 대한 이해를 거듭하며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특성을 늘 기억해야 한다.
내가 자주 보는 산부인과 의사의 인스타툰에 '남성→여성 성전환 트랜스젠더에게도 질염이 생긴다'는 내용이 올라온 적 있다. 그 환자는 남성 성기를 제거하고 인공 질을 만드는 수술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인스타툰을 본 사람들의 평가는 크게 두 부류로 갈렸다. 첫 번째는 트랜스젠더의 인공질은 엄밀히 말하면 여성의 질과 다른데 어떻게 '질염'이 생겼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두 번째는 인공 재료로 코 재건술을 받은 사람의 코를 '코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인공질 역시 질이며 질염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는 거였다. 너무 좁게 정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넓어진다. 우리는 전혀 다른 종인 물고기와 외계인의 고통까지 염두에 둘 수 있는 존재다. 이걸 받아들여놓고, 같은 호모사피엔스 종인 트랜스젠더의 질염을 못 받아들인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질염은 선천적 생물학적 여성만의 전유물일까? 첫 번째 주장은 고통을 '인간 뇌의 C 섬유'로 정의하는 것과 비슷한 관점이다. 선천적 생물학적 여성의 질을 갖고서만 '질'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고 있어서다. 이 경우 우리는 선천적 생물학적 여성의 질만 '질'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트랜스젠더의 인공질은 '질'이 지칭하는 범주 바깥에 있게 된다. 정의상 질이 아니니 질염이 생겼다고도 말하지 못할 거다. 두 번째 주장은 '복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기능적 정의'와 맞닿아 있다. 선천적 생물학적 여성의 질과 트랜스젠더의 인공질은 세부적 구조나 구성 측면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러나 각각의 질이 각자의 몸에서 질로서 기능하고 있다면, 인공질이든 선천적 생물학적 여성의 질이든 넓은 의미에서 '질'이라고 부르는 데 무리가 없다는 관점이다.
이런 주장도 있었다. 선천적 여성의 질에서 질염을 일으키는 균과 동일한 균이 트랜스젠더의 인공질에서도 질염을 일으키느냐는 거였다. 원인균의 종류가 같아야 질염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관점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린 관점이다. 이부프로펜 같은 특정 성분만 해열제라고 주장하는 거나 마찬가지여서다. 성분과 구체적 작용 기전이 어떻든 간에 먹어서 열을 떨어뜨릴 수 있는 약이면 해열제라고 한다. 실제로 해열제라고 불리는 약의 성분은 이부프로펜 이외에도 다양하다. 질염은 질에 생긴 염증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단어다. 질염을 자주 유발하는 균들이 있는 건 맞지만, 반드시 이들 균에 의해 염증이 생겨야만 질염이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남을 배척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