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호초 Aug 23. 2023

우리는 덜 싸울 수 있다

들어가는 말

철학과를 다닌다고 말하면, '넌 무얼 위해 싸우니?'라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철학도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투쟁도 불사하는 사람'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사람' '데모하는 사람' 정도였을까. 우리 과에 그런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다른 과에 비하면 그런 사람의 비율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선배가 빌딩 옥상에서 시위 전단지를 뿌리다가 경찰서에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건너 건너 아는 또 다른 선배는 학교를 상대로 시위하다 겉보기엔 자퇴인 퇴학을 당했다고.


나는 그런 물음을 받으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찬성과 반대 사이 고성이 오갈 때, 맨 뒷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철학 수업을 들을 땐 매 순간이 혼돈의 도가니였다. 교수님은 '소수자 할당제' 같은 주제를 던져주고 학생들이 의견을 얘기하게 유도했다. 처음엔 내 생각 말하기로 시작된 게 나중 가선 반대 의견에 반박하기로 바뀌었다. 격양된 말투가 오가기 시작하면 논리를 떠나 기 싸움에 눌린 쪽이 진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쪽은 저래서 일리가 있고, 저쪽은 이래서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저 둘이 싸워야 할 이유가 뭘까. 굳이 싸워야 할까.


말하자면 나는 평화주의자다. 요즘 말로 나쁘게 말하면 '회피형'이다. 평화주의자만큼 대세에 안 맞는 사람도 없다. 지금은 투쟁과 주장과 발언의 시대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지금 싸우고 풀지 않으면 나중 가서 더 크게 싸우게 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댓글 창에 그렇게들 모이는 것이다. 키보드 설전을 펼치며, 누구의 잘잘못이 큰지를 따져가며. 개중엔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의 말에서 그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읽고 여기에 화내는 사람. 사실관계에 관한 말을 가치에 관한 주장으로 오해해 버럭 하는 사람. 양립할 수 있는 주장을 양립할 수 없는 주장으로 갈라치는 사람. 밟고 선 곳이 달라 다른 시선을 틀렸다고 비난하는 사람. 행간에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욕'을 발명해내는 사람. 없는 사실에 분노하는 사람. 없는 사실에 관한 분노에서 꼬투리를 잡아, 또 자기 몫의 분노를 펼치는 사람….


댓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그 열불나는 마음은 이해한다. 세상엔 나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죄다 글러먹은 인간말종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는 생각보다 괜찮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수학 기호를 써서 싸우는 게 아니다. 아름답고, 어설프고, 느슨하고, 무궁무진한 자연어로 싸운다. 수학 기호는 사용하는 순간 수학적 의미가 확정되지만, 자연어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한국어 화자지만, 같은 표현이라도 본인의 배경지식과 언어적 습관과 상황 맥락에 의해 각자의 용법으로 사용하곤 한다. 쟤가 한 말이 대충 무슨 뜻인지 추측할 순 있다. 또 언어적 규칙과 관습에 의해 많은 경우 그 추측이 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추측이 틀릴 때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우린 지금처럼 뜨겁게 싸워야 한다. 그러나 말에서 비롯된 소모적 싸움을 가려내는 법도 배워야 한다. 세상엔 제대로 싸워야 할 일만 해도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싸움의 도구인 '언어'가, 얼마나 비확정적이고 유동적인지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