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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초 Sep 12. 2023

잘못은 사람 말고 언어에

노키즈존에 대한 철학적 변명

※이 글을 읽고 나면...
1. 노키즈존 매장의 사장이 정말 아이를 싫어해서 '노키즈존 팻말'을 붙인 건 아닐 거라고... 그를 욕하기 전에 인간적인 변명부터 선물할 수 있다


원하는 사람만 명확하게 콕 집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실제 언어 환경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가에서 월세를 지원받음직한 청년'을 골라내기 위해 가구소득이 얼마 이하고, 본인 연봉은 얼마 이하고, 월세는 얼마 이하고... 이런 기준들을 마련한다. 아무리 꼼꼼하게 기준을 세워도 가끔 엉뚱한 사람이 집어내진다. 이 기준을 다 만족하긴 하나, 월세 낼 돈이 부족하진 않은 사람도 간혹 지원 대상 리스트에 오르기 때문이다. 반면, 월세 지원이 정말 간절해도 모종의 이유로 만족하지 못하는 기준이 있어 지원 대상에 오르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기준들을 내세워 대상을 집어내는 건 좀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내가 카페 사장이고, 카페의 정상 영업 방해를 하는 사람들을 '출입 금지'시키려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영업 방해 상황은 너무 다양하다. 갑자기 카페에 들어와서 노래부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외부 음식을 반입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이런 저런 영업 방해 상황을 다 나열해서 기준으로 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영업을 방해하는 사람은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면 되는 게 아닐까? 이성적으론 이게 맞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적용되기 어렵다. 영업을 방해할 정도로 진상이라면 사장이 '영업이 방해되니 나가주세요' 라고 요구해도, '내가 왜 영업을 방해하는 사람이야?' 라고 되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어내려고 의도한 대상을 제대로 집어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나온 게 '노키즈존' '노시니어존''노20대존'이라 생각한다. 키즈, 시니어, 20대는 기준이 명확하다. 키즈, 시니어, 20대인 사람이 본인이 키즈, 시니어, 20대가 아니라고 우기기는 진상인 사람이 본인이 진상이 아니라고 우기기보다 어렵다. 대상을 성공적으로 집어낼 확률이 높은 단어다.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오자. 어떻게 하면 언어를 통해 원하는 대상만 콕 집어낼 수 있을까? 비슷한 고민을 옛날 철학자들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만을 콕 집어 지칭하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아 할까?




여기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된다. 첫째가 이름을, 둘째가 한정 기술구를 부르는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플라톤의 제자이며, 누구나 아는 바로 그 고대 그리스 철학자를 지칭한다. 그럼 이 이름이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철학자를 가리키는 이유는 뭘까.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 그 자체는 어떤 발음의 연속일 뿐이며, 이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철학자)에 대해 표현하거나 알려주는 바가 없는 데도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기술 이론)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으로 위대한 철학자를 가리킬 수 있는 까닭은 이름이 대상의 한 측면을 기술하는 구(구절이라고 할 때의 그 '구')인 '기술구'와 결부돼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은 '플라톤의 가장 훌륭한 제자'라는 기술구의 짧은 형태고,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말하는 순간 이름 뒤에 숨겨진 한정 기술구를 통해 위대한 그리스의 철학자를 지칭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에 결부하는 기술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경험과 지식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더 알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은 덜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 A라고 알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은 B라고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이름에 사실과 다른, 잘못된 기술구를 결부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철학자 크립키가 제안한 사고실험이 하나 있다. 바로 괴델-슈미트 논변이다.

쿠르트 괴델이란 수학자가 있다. 현실 세계에서 그는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다. 크립키는 이게 사실이 아닌 세계를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슈미트라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불완성성 정리를 증명했으나 괴델이 이 공을 가로채, 대중들은 괴델이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알고 있는 세계를 가정할 것이다. 즉,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경험한 바는 실제 현실 세계에서와 다르다.

기술 이론의 방식을 따르면, 가정된 세계의 일원인 화자가 "괴델"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는 "괴델"이란 이름에 자신이 결부시킨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수학자"라는 기술구에 들어맞는 대상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구를 통하면 화자가 원래 가리키려고 했던 괴델이 아닌 슈미트가 지칭된다.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수학자라는 기술구가 실제로 들어맞는 대상은 (괴델이 아니라) 슈미트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괴델"이란 이름을 통해 지칭하고자 했던 사람은 슈미트가 아닌 괴델이다. 여기에서 기술 이론의 모순이 발생한다고 크립키는 지적한다. 크립키에게 이름은 그냥 인덱스(index)다. 이름이 어떤 기술구를 매개로 대상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이름은 대상에 바로 내려꽂히는 방식으로 대상을 지칭한다.

복잡하니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1)"괴델(이름)" -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수학자(기술구)"라는 잘못된 연결쌍을 가지고 있을 경우, 기술 이론의 방식을 따르면 화자는 "괴델"이란 이름을 통해 "슈미트"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게 된다.
(2)그러나 화자가 "괴델"이란 이름을 통해 지칭하려고 의도한 대상은 슈미트가 아닌 괴델이라 보는 게 맞다. (3)그러므로 이름이 '이름에 연결된 기술구'를 매개로 대상을 집어낸다는 기술 이론은 잘못됐고, 이름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고 보는 게 맞다.

굳이 가상의 세계를 가정하지 않아도 예시를 들 수 있다. 우리가 기술구를 거치지 않고 이름만으로 곧바로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는 실생활에서도 많다. 화자가 김초엽이나 천선란 이란 소설가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들의 이름과 직업(sf장르를 주로 쓰는 소설가)만 대략적으로 안다고 가정하자. 화자가 각각의 이름에 결부할 수 있는 기술구는 "한국의 유명한 sf 소설가"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기술구만으로는 천선란과 김초엽을 구분하기 충분치 않다. 그래도 화자는 둘 중 누군가의 책을 읽고 "한국의 유명한 sf 소설가가 쓴 그 책 재밌더라" 따위의 말을 할 때 천선란이든 김초엽이든 성공적으로 가리킨다. 두 소설가에 대해 잘 모르는 화자가 김초엽, 천선란이란 이름으로 각각의 소설가를 지칭할 땐, 이 지칭의 과정이 이름에 결부된 기술구를 거쳐서 이뤄진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유명한 sf 소설가"라는 기술구(화자가 두 소설가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정보)만 가지고 김초엽이나 천선란 중 하나를 콕 집어 지칭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중 하나를 특정하기엔 정보가 모자란다.




이쯤 되면 알겠지만 크립키는 기술 이론이 틀렸음을 보이기 위해 괴델-슈미트 예시를 든다.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은 화자의 마음속에 있는 기술구에 가장 잘 들어맞는 대상(앞선 예시에선 슈미트)이 아니라 화자가 그 이름을 사용해 가리키고자 의도한 대상(앞선 예시에선 괴델)이라는 견해를 옹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크립키의 이같은 주장에 대한 반론이 있을 뿐더러, 우리에게 있어 어떤 철학자가 결론적으로 승리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후대 철학자에 의해 논박된 철학자의 주장이라도 나름 일리있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되는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요긴하게 쓰면 그만이다.

그래도 설명해보자면, 크립키에 대한 반론은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 그 이름에 대한 '올바른 기술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고정된다고 주장한다. 내가 리처드 파인만(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탄 예술가'로 잘못 알고 있고, "파인만"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이 기술구를 결부시킨다고 해서 파인만이라는 이름에 의해 아니 에르노(실제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집어내지는 건 아니다. 나는 잘못된 배경지식에 바탕해 이름에 잘못된 기술구를 연결했지만, 이런 나조차도 "파인만"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바로 그 파인만을 올바르게 지칭한다. 크립키는 이 점에서 이름이 기술구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대상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지만, 기술구를 살릴 방법은 여전히 있다. 이 세계엔 나와 달리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탄 예술가"라는 기술구는 "아니 에르노"라는 이름의 프랑스 문학가에 해당한다는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과 기술구의 지칭 대상은 올바른 지식을 지닌 이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면, 나 하나쯤이 "파인만"이란 이름에 대해 '잘못된 기술구'(파인만=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갖고 있대서 기술 이론이 무너지지 않는다.




노키즈존이란 단어를 이해해보려 노력할 때도, 우리는 지금껏 이어진 논의에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다.

첫째, 앞서 언급한 철학적 논의는 여러 명의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한 대상'만 가리키는 걸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름에 한정 기술구를 결부시키듯, 단어에 기술구를 결부시켜 대상을 집어내는 방식은 널리 쓰인다. '고양이'라는 단어에 '귀가 세모 모양이고 네 발로 걷는 포유류 반려동물' 정도의 기술구를 결부시키고, 이 기술구에 해당하는 동물을 고양이라고 판단하는 식이다. 다만, 이 경우 특정한 고양이 한 마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양이 일반을 집어낸다는 점에서 한정기술구와 차이가 있다.

둘째, 우리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에 내가 대상에 대해 주관적으로 갖고 있는 기술구를 결부시키곤 한다. 영업을 방해하는 손님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카페 사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변수를 만들고 영업을 방해하는 대상은 아이 이외에도 많지만, 어떠한 이유로 사장이 아이들에만 주목해 아이들 때문에 영업이 방해받고 있다고 믿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또는 학교나 유치원 근처에 카페가 있다든가 하는 지리적 이유로 진상 손님 중에 아이 손님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두 상황 모두에서 카페 사장은 자연스레 '아이'라는 단어에 '변수를 만들고 영업을 방해하는 대상'이란 기술구를 결부시키게 된다. 이 경우 사장은 '노키즈존'이란 단어를 '영업을 방해하는 대상은 출입금지'라는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다.

셋째, 그러나 사장 말고 제 3자는 키즈(어린이)가 갖는 사회적 의미로 이 단어를 이해하게 된다. 사장이 '영업 방해 대상은 출입 금지'라는 별 악의 없는 의미로 '노키즈존'이란 단어를 썼더라도, 실제 세상에선 키즈이기만 하면 출입이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진다. 어린이란 단어가 사회적으로는 청소년기 미만의 미성년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얌전하고 말썽을 피우지 않는 어린이라도 매장 안에 발을 못 들이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물론, 노키즈존에 대한 이 해석은 '노키즈존' '노시니어존' '노20대존'이란 단어를 쓴 사장에게 별 악의가 없었으며, 단지 언어의 사용이 정교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변호해주기 위해 고안됐다. 실제로는 사장이 '영업 방해하는 진상'에 대한 잘못된 비유로 '키즈'란 단어를 쓴 게 아니라, 진짜로 '청소년기 이전의 미성년자'를 가리키기 위해 이 단어를 썼을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애써 후자가 아니라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해줘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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