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뒤덮인 한적한 프랑스 시골 마을. 한 남자가 추락했습니다. 집엔 유명 작가인 아내와 시각장애 아들, 그리고 강아지밖에 없었습니다. 창의 높이나 피가 튀긴 흔적을 봐서 단순 사고라고 보긴 어려운 상황. 결국 아내가 죽였느냐, 남편의 자살이냐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법정 공방이 이어집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영화 ‘추락의 해부’(연출 쥐스틴 트리에) 얘기입니다.
◆정교한 법정물이 아니다
전형적인 법정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감독은 진상 파악엔 관심이 없습니다. 사건은 목격자도 증거도 자백도 없이 오로지 정황뿐.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 재판을 믿거나 아니거나 선택의 문제로 전락시킵니다.(그런데 동시에 격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창작자로서 사실보다 믿음과 결단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결정적 증거가 없다 보니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는 ‘소설’을 쓰기 바쁩니다.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가 생긴 아들로 인한 갈등, 아내의 성공에 대한 남편의 질투, 아내의 외도, 재정적 문제, 우울한 남편과 무정한 아내의 태도 등이 변론과 녹음, 회상 등 다양한 영화적 기법으로 관객들에게 제시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지적 매력에 반한 성공한 교수와 작가 부부는 우울증에 걸린 남편과 외도하는 아내로, 부부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끔찍한 덫으로, 사랑하는 아들은 부양이 필요한 짐짝으로 전락합니다.
제목의 ‘추락’은 남편의 추락뿐 아니라 가족의 추락, 사랑의 추락, 명예의 추락, 신뢰의 추락 등등을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해부’되는 건 죽음의 진상이 아니라 가족의 불편한 민낯입니다.
◆창작에 관한 영화
저마다의 주장만 있을 뿐, 실체적 진실은 미궁에 빠진다란 얘기에서 그친다면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걸작 ‘라쇼몽’의 아류일 뿐이죠.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해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 즉 창작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부부 관계의 모든 것을 샅샅이 해부하려는 법정에서 공백으로 비워진 단 하나의 부분은 남편이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영화에서 남편이 추락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법정에서도 추측만 할 뿐 알아낸 것은 없죠. 아내는 법정 진술을 통해, 남편은 녹음을 남겨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지만, 결말이 결여된 양극단의 ‘소설’일 뿐입니다. 결론을 내지 않는다면 이 재판은 영원히 미완성인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서사의 마지막 공백을 메우는 건 제3자인 아들 다니엘입니다. 이 영화를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끈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남편과 아내, 피해자와 피고인 모두와 친밀한 아들이자,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재판 마지막 날 진술을 해야 하는 다니엘은 고민에 빠집니다. 본인도 진상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빠가 자살했느냐, 엄마가 아빠를 죽였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죠.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를 믿어야 하는데 선택지가 두 개라면 하나를 선택해야지"란 조언에 다니엘은 반문합니다. "믿음을 지어내라고요?"
감독은 다니엘이 법정에서 증언할 때까지 그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관객이 알지 못하도록 연출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다음이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추락사의 진상을 궁금해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관계 파악이 어려운 다니엘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궁금한 거에요.)
그리고 다니엘은 법정에서 "어떻게 그랬는지 판단할 증거가 부족하면 정황을 봐야 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판단하고, 한쪽 결론을 선택합니다. 나름의 서사를 완성한 거죠. 이야기를 자살한 아빠가 시작했든, 아빠를 죽인 엄마가 시작했든 상관없이 이 소설의 결말은 다니엘이 썼고, 이 이야기는 다니엘의 것으로 남습니다. 물론 다니엘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하며 다시 관객이 자신이 받은 인상을 토대로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도 있겠죠.
◆후일담
이 영화는 청각적 즐거움이 두드러집니다. 일단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까지 자그마치 세 가지 언어가 쓰였습니다. 아내 산드라는 독일인, 남편 사뮈엘은 프랑스인인데, 서로 상대방 나라의 언어를 제대로 쓰진 못하다 보니 영어를 공용어로 써요.
그리고 부부 관계의 단면을 법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제시할 때도 청각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개입시키며 시각적 요소와 충돌시킵니다.(영화 많이 본 분이라면 쾌감이 들 수밖에 없는 연출입니다.) 특히 부부의 언쟁이 녹음된 녹취록을 법정에서 들려주는 대목이 백미입니다. 플래시백으로 부부가 당시 말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돌연 법정 안의 인물들을 비추며 청각적으로 둘의 대화에 몰입하게 합니다. 녹취록 텍스트도 깨알같이 보여집니다. (법정은 시청각의 향연입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배심원처럼 제시된 사실 너머로 특정한 인상을 품게 되죠. 시청각적 자료로 어떤 심증을 품게 하는 것이 영화적 쾌감을 주는 지점이고, 감독 조차 어떤 정답을 설정하지 않은 건 관객을 기만하지 않는 윤리적으로 탁월한 부분이라고 개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 산드라 역의 독일 배우 산드라 휠러는 강인하면서 예민한 작가의 복합적인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을 무자비한 여자로 공박하는 증언을 들을 때마다 무표정하게 멍 때리는 연기가 개인적으론 좋았습니다. 풍부한 표정 연기가 나왔다면, 이 영화도 별 수 없네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강아지 ‘스눕’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거품 문 채 쓰러진 명연기로 칸영화제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친 개에게 주어지는 팜도그상을 받았습니다.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또 하나의 장면은 영화 맨처음 장면입니다. 1층) 아내 산드라와 인터뷰 학생/ 2층) 아들 다니엘과 강아지/ 옥탑방) 남편 사뮈엘로 나뉜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홀로 수직으로 움직이는 스눕의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남편은 청각적으로 거대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장면의 교차, 산드라의 짜증스런 얼굴 클로즈업 만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죠.
사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아내에게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타살이면 그에게 책임있는 게 당연하고, 자살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죠. 전술했듯 법정에서 딱 하나 밝힌 게 부부 갈등의 민낯이었고, 아내도 분명히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리게 한 것이 자신이란 점을 깨달으니까요.
이런 점에서라도 영화에서 추락사에 대한 진실을 고민하는 건 사실 의미 없는 일입니다. 감독 역시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요. 소설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요. 이야기의 결말은 사실이나 논리적 추론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작가의 의지, 작가의 감정, 작가의 믿음, 작가의 결단에 따른 것이죠. 진작 말했어야 하는 부분인데, 산드라와 사뮈엘 모두 작가인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더구나 영화 내내 산드라의 소설을 갖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어요. 감독은 전작 '시빌'에서도 소설쓰기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창작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던졌습니다. 아무래도 이 문제에 꽂힌 창작자인가봐요.
<제 결론은요> ‘감’
재미 ★★★☆
연기 ★★★★
외국어듣기 ★★★★
해석의 다양성 ★★★★
종합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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