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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폐관수련인 Dec 05. 2022

남겨진 사람

그립고 그리운 사람에게

나에게는 작은 삼촌이 있었다. 일을 멀리하고 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한량처럼 술에 빠져있는 모습에 가족들 다 싫어했지만 나에게는 누구 보다 가장 좋은 삼촌이었다. 원래부터 삼촌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외숙모와 이혼한 뒤로부터 삼촌의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자식 둘을 홀로 키우는 삼촌이 걱정되셨는지 나보고 사는 것 좀 살펴보라 하셨었다. 안산에서도 끝자락인 이 시골 마을에서 조카가 오니 반겨주시는 삼촌이 기억이 난다. 요리를 할 줄 몰라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주시고 따로 남는 방을 주셔서 하룻밤을 묵게 해 주셨다. 겨울에 찾아갔는데, 손이 시릴 정도로 너무 추워 잠에 들기 힘들어서 삼촌한테 보일러를 켜달라고 하려 했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두 자식들과 부둥켜 잠을 청하고 계셨다. 삼촌 방도 사무치게 추웠다. 가스 비를 낼 돈이 없는 거다.


삼촌은 본인 앞가림도 못하면서 아침에 택시 타고 집에 가라며 구겨진 돈을 쥐어주셨다. 미련한 사람.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으로 향할 동안 삼촌과 만날 때마다 내게 그저 막연한 칭찬과 덕담을 해주셨다. 그저 삼촌에게 나는 착한 친척, 머리 좋은 조카이다. 점점 삼촌의 몸 상태가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삼촌 본인이 주변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아 신나 했던 2018년, 삼촌은 돌아가셨다. 아침에 서울로 어학원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서려는데,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은 어머니께서 크게 놀라셨었다. 당장에 학원을 다녀오고 저녁에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다.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운데, 하루 종일 얼이 빠져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할머니를 차마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 해는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해였다. 봄인데, 뼛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참 야속하게도 사무치게 추웠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마음보다 시릴 수 있을까... 할머니께서 삼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은 "잘 가거라"였다.


이후 슬픔에 잠긴 어머니가 걱정되었지만, 내가 잘 되는 게 그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린 거라고 생각해서 유학 준비에 열중했다. 다시 겨울이 온 그 해 말, 나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인생은 파도와 함께 물결치며 흘러가는 유속 같다. 나는 왜 여기 누워 있는가. 정신을 차리니 가족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력 그리고 또 노력을 외쳐오면서 정작 나를 봐주지는 않았었다. 막상 절망 속에 빠지게 될 때, 그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를 사랑해 줘야 하는 내가 그러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불안함이 나아지질 않아서, 입원 중에도 인터뷰를 했었다. 갈수록 지원서에 대한 답변은 오지 않고, 늘어가는 부모님의 한숨이 참 죄송스럽고 괴로웠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며, 살아만 있으면 빛 볼 날이 오겠지 하고 계속 시도했었다.

미국만 주구장창 1 년을 지원했는데, 1 달 지원한 독일에서 내게 기회를 주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결정된 상황에서 막상 유학을 떠나려니 준비해야만 하는 것도 많고 불안한 것도 많았었지만, 독일에 오고 나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차분하고 덤덤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교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뵈러 갔을 때, 가족들은 연락이 닿지 않는 내가 크게 걱정되어 잠도 못 이루고 있으셨다고 한다. 거절받고 어디 굴다리 밑에서 울고 있는 건 아닌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 될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막상 베를린에 오니 유럽은 처음이어서 어디 마음 좀 쉬게끔 관광지를 둘러보았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오고자한 hackescher markt 로 길을 나서는데 집시들한테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독일인이 알려줘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첫 주말이자 바람이 참 많이 부는 날이었는데, 혼잡스러운 날씨와는 달리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했다. 베를린 성당을 둘러보다 본관에 들어서 자리에 앉는 순간, 원인모를 눈물이 벅차올랐다.


사무치게 울고 또 울었다. 원인 모를 눈물에 가장 생각나는 건 삼촌이었다. 박사가 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눈물 콧물 다 나오고 꺼이꺼이 울어대는 내 모습에 어린 꼬마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손수건을 건네줬다.


나는 종교는 갖고 싶지 않지만, 사람의 영혼은 믿고 싶다. 이제는 예전처럼 명절 자리에 다 함께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는 없음에도, 꿈에서라도 만나 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나의 형이자, 친구, 아버지였던 우리 삼촌, 나에겐 항상 멋있고 고마웠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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