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관계의 이해
가끔 세상의 사물들이 마치 아주 먼 옛날부터 짜인 복잡한 설계마냥 느껴질 때가 있다. 이들은 형체도 없으면서 갑작스럽게 유형으로서 전달되는 육감의 영역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는 무엇이 시초였을까, 3차원의 공간을 사는 생물들은 1, 2차원을 한눈에 볼 수 있음에도 원인이 불분명하다. 나에게 아직도 아리송하게 만드는 네팔에서의 인연이 그러하다.
2016년과 17년, 두 번의 기회로 이 히말라야의 나라에 방문했다.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리, 직접 지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지도 교수님 따라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출발 직전까지도 외국에 간다는 것으로만 마음속에서 붕 떠있었다. 준비도, 계획도, 거기서의 생활도 어째서인지 물 흘러가듯 다녀오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마음 가짐이 달라졌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가장 열심히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초면에 어색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네팔인들과의 교류도, 그들을 위한 봉사 업무까지 진을 빼가면서도 즐거웠었다.
참 순박하고, 심성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 봉사 참가자들이든, 현지인들이든 좋은 사람들 무리에는 좋은 분위기만 생기는 것 같았다. 열악한 시설과 부족한 경험으로 피까지 봐가면서 뛰어다니며 몸을 부렸음에도 매일같이 몰아치는 연구성과 달성보다 즐겁다고 느껴졌다. 그때는 몸 쓰는 일이 천직인가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같이 갔던 사람들이 좋았던 거다.
언제나 나는 무슨 일이든 독불장군처럼 혼자 달려드는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과 공생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혼자가 편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함께한 1주일은 이런저런 계산 없이 함께 하게 되었다. 후에 깨닫게 된 건, 친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였다.
언제나 일기에 비관하듯 내가 얼마나 모질이인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이런 내 인생도 급급한데, 남의 인생을 응원해 준다는 건 염두도 안나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들의 인생이 진심으로 잘 풀리기를 응원하고 있다. 나는 내가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다 잘되는 거 보면, 내가 복돼지인가라고 생각 되었었다.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응원한다고 해서 그들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래 대단한 사람들인 거다. 그런 나에게 네팔로 향하게 만든 우연들은 우물 안 개구리마냥 있지 말고 더 나은 사람들을 보고 배우라는 뜻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우연으로부터 유형의 에너지를 내게 전달 주었다.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이런 순간들이 기억나기 마련이다. 공적으로나, 대면적으로나 규모 있는 일이 아니기에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순간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시간들이 지금까지도 중요하게만 느껴진다. 우연이 그렇게 필연으로 다가온 것 같다. 아니면 사소한 우연이라는 건 없었던가.
물론,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매번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결국 나에 의한 선택이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며 또 다른 우연과 마주치게 만들어 주겠지만, 이와 같은 인연은 지금 생에서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