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점이 되고 싶다.

by 김태연



그야말로 무기력함의 끝판왕. 오늘 드디어 오고 말았다. 어쩐지 요즘 부지런하게 움직이긴 했다. 멍하니 놀이매트 위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늘은 지구의 점이 되고 말거야.라고 스스로 약속했다.

우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이 와중에 캡슐커피도 다 떨어졌고, 에라 모르겠다. 나는 커피 두 잔과 밀크티를 배달어플로 주문했다. 카페인은 이 정도 먹어줘야 각성이 되지.라고 으흐흐. 나도 모를 이상한, 약간 정신 나간 웃음을 지으며 결제 버튼을 누른다. 결제가 됐다!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다.




지구의 점이 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점은 원래 움직이지 않으니, 나는 오늘 최소한의 움직임만 할 생각이다. 아뿔싸, 커피가 왔는데 한잔이 더왔다. 나도 모르게 한잔 더 시켰나 보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배달 어플도 제대로 확인하기 싫은 귀찮은 날이 있지. 날 위해 한잔 더 시켰다 생각해야겠군. 나는 스스로 위로하며 냉장고에 커피를 집어넣는다. 시켜둔 밀크티 한잔을 마시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검은 것은 한글이고, 하얀 것은 백지판인데 나는 쓸 말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앉아서 쓴다. 기왕 쓰고 있으니, 이 무기력함의 원인을 찾아야겠다. 어젯밤 더위에 설쳐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 걸까. 너무 일찍 잠들어서 새벽에 깬 채로 글을 써서 그런 걸까. 아이들과 같이 거실에서 그냥 뻗어 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제 속이 안 좋았기 때문인가.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어제 가스가 빵빵하게 찬 배를 하루 종일 가지고 있었다. 그 덕에 저녁도 먹지 않았다. 아마 내가 지금 힘든 것은 어제의 그 모든 일들의 결합 때문인가.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긴다.


생각해보니 어제 중고서점에 갔었고, 가기 전에 배가 좀 불편했다. 서점에 갔을 땐 괜찮았지만, 나와서 혼밥을 하며 음식을 남겼다. (음식을 남기다니!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끼니 챙겨 먹기 아니었던가?) 중고서점에는 내가 읽을 책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편독이 심한 나는 호흡이 긴 글은 잘 읽지 않는다. 왠지 읽다가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책을 주로 읽는 편이다. 외국작가가 쓴 책들은 정서에 잘 맞지 않는다. 정리에 관한 책을 엄청 읽는다(남편이 제발 그만 좀 읽으라고 한다) 그러나 살림에 관한 책은 읽지 않는다. 소설도 잘 읽지 않는다. 에세이집은 좋아하지만, 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내나이또래나, 나보다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의 책을 읽는다. 그러나, 어려운 책은 읽지 않는다. 나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쉬운 말을 쓴 책을 읽는 편이다. 삶의 성찰이나, 고찰 같은 책도 읽지 않는다. 사는 것 자체가 성찰이고, 고찰이라 생각하는 여자기 때문이다. 부동산에 대한 책보다는 어떻게 빚을 줄여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책을 찾는 편인데, 생각보다 그런 책은 많이 없다. 좀. 편독이 심하다.


에세이집은 두꺼우면 일단 덮어버린다. 얇고 가볍게 읽히는 것이 좋다. 책이란 모름지기 휴대성이 좋아야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도 그렇게 가볍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늘 글을 쓴다.

진지하면 읽는 사람도 심각해지고, 너무 가벼우면 읽는 이의 입장에선 시간이 아까우니 적당한 가벼움이 좋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중간의 적당함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다시 지구의 점이 되어 엎드려 누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있을 것이다.

낮엔 잠이 잘 오지 않기 때문에 공상에 빠질 위험이 높다. 그러나 나는 그 공상도 오늘은 저리 가라고 휘젓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까 한다. 그 공상 속에선 나는 엄청난 커리어 우먼이 되기도 하고, 돈 많은 재벌집 딸내미가 되기도 하는.. 어쨌든 애엄마는 아닌 것이다. 그 정도 공상이면 우수하지 않은가? 아주 건강한 공상이라 생각한다. 지구의 점은 그 정도면 아주 괜찮다. 지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오늘 지구의 점이 될 것이다. 그 누가 뭐라 한대도.



keyword
이전 14화흔들리며 피는 꽃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