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덜 상처받기 위해 무엇이든지 꾸며 낼 수 있다
본가에서 자취방으로 이사를 하던 날이었다. 30대, 늦은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가족들과 책장과 책상 그리고 의자를 사러 가구점에 가려고 했다. 현관을 나서는데 코에서 액체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콧물이겠거니 만져보니 붉은 피가 손가락에 묻어있었다. 다시 집에 돌아와 물로 대강 씻어내고 지혈을 해봤지만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에도 이와 비슷하게 코피가 난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피가 멈추지 않자 죽을병에 걸린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고, 보건실에 가서 펑펑 울었다. 보건선생님은 의아해하셨지만 진지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마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사실 죽는게 두려웠던게 아니었고, 당시에 죽을 만큼 힘든 내 감정을 소화할 길이 없어서 힘들었던게 아닐까.
엄마는 집에 있을 때 온종일 클래식이나 가요를 틀어놨다. 윤미래의 하루하루나 지오디,브라운아이즈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또래보다는 가요에 일찍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에 나는 여느 꼬마들이 그렇듯이 옷입는 것에 대해 투정을 하기도 했다. 한번쯤은 받아줄만도 한데 늘 엄마의 의견에 피력당했다. "나 이거 입고싶은데." 라며 떼를 써봤지만, 엄마의 옷입는 철학을 깰수는 없었다. 과거 사진앨범을 보면 그때 입었던 옷들은 하나같이 쨍한 원색이지만 20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느낌이 난다. 미적감각이 있었고 센스가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내가 봤을 때 예쁜 것'에 대한 기준을 알기 어려워졌다. 의견을 존중받기보다 늘 부정당했기에. 그런 마음은 후에 더욱 자라나 '무엇이 정답인지'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던 것이다. 내가 맞다생각해도 남이 아니라고 하면 불안하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게 좀 쉽지 않아진 이유 중 하나였다.
또한 엄마의 음식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잠실에서 송파동으로 이사왔을 때 새우로 국물을 낸 칼국수를 자주 끓여주셨다. 나름 자부심이 있는 요리였나보다. 우리 집에 방문한 손님들에게 서슴없이 맛을 자랑하기도 했다. 국물 맛은 해물 특유의 시원한 맛이 났다. 문제는 건더기였다. 새우를 따로 손질을 하지 않고 면과 함께 대충 끓였다. 재료 다듬는 방법을 모르셨던걸까. 아니면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걸까. 대접에는 면과 새우수염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칼국수를 먹을 때 마다 면과 새우 수염을 같이 씹어 삼키게 됐다. 맛이 좋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사고과정은 대수롭게 않게 여길 수 없었다. 첫째, 새우는 다소 손질이 까다로운 재료라는 것. 둘째, 당장 편하려고 음식에 그대로 때려 박았다는 것. 그런 음식을 불편하게 먹는 사람들. 엄마가 새우칼국수를 끓이는 방식은 적지않은 수치심을 가져다 줬다.
초등학교 5학년 추석연휴 전. 앞서 말했던 문제의 코피사건이 있던 시기와도 겹친다. 하교를 하고 집에오니까 식탁에 피자두판과 치킨한마리가 있었다. 옆에는 쪽지 하나가 반듯한 글씨로 적혀져있었다. 미안하다는 문장을 읽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가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나머지 내용을 채 읽기도 전에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저 배가 고팠고 대수롭지않게 피자와 치킨을 먹었다. 가끔 슬프지않았냐고 묻는 이가 있었는데, 눈물이 난다기보다 아무감정도 느낄 수 없던 것에 가까웠다. 집에서 그녀의 흔적을 느낀 마지막 날이자 그리고 배가 많이 고팠던 날로 회자될뿐이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왜 하나같이 쉽게 행동을 하는 걸까. 새우칼국수를 끓이는 일도. 밥이 아닌 건강에 좋지않은 패스트푸드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모든 것이 쉽기때문에 자식도 버릴 수 있는걸까. 당시에 깊은 무력감을 감당 할 방법을 몰랐고, 그 감정을 나름대로 표출시키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고작 코피를 흘리면서 죽음까지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