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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28. 2023

내가 너한테 옷 사줬잖아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던건 '옷'이다. 주로 보세 의류였으며 원색으로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열 두살 때 였지만 집에 도착하자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 엄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광명을 보겠다고 남편과 자식 둘을 버리고 달려간 곳에서 엄마는 과연 그 빛에 닿았을까. 이후의 이야기는 알 길이 없다. 단지, 내가 아는 건 남겨진 이들은 긴 세월동안 폐허속에서 허덕여야 했다는 것.


 망토를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엄마는 흔쾌히 사준다고 했다. 다음 날 동대문에 있는 밀리오레 쇼핑몰에 갔다. 나의 니즈는 확실 했다. 보슬보슬한 하얀 털이 달린 연분홍색 망토. 하지만 엄마는 내 의견을 가볍게 무시했고, 새빨간 망토를 골라줬다. "이게 더 예뻐." 떼를 써보고 울어도 봤지만 엄마는 깡끄리 무시하고 기어코 빨간망토를 사버렸다. 그렇게 심통난 표정으로 터덜터덜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물건을 고를 때 마다 이러한 패턴은 반복됐다. 연분홍색 망토가 갖고싶었지만, 돌아 온 것은 빨간색 망토였다. 내 물건이지만 엄마가 볼 때 더 예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고집했던 연분홍색 망토는 틀린 것이 된다. 빨간색 망토만이 정답이 된다. 내가 입을 옷이지만 스스로 정할 기회를 항상 잃어버렸다. 모든 것은 엄마가 선택해줘야 맞는 게 된다. 단순히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것을 떠나서 무언가를 선택 할 힘을 기를 틈이 없었다. 단순히 옷 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주도권을 완전히 엄마에게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취향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정답과 오답은 둘 다 없다. 말그대로 '취향'이기 때문이다. 자기 기준에서 적절한 것과 덜 적절한 것이 있을 뿐이다.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해 시행착오는 필수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깡끄리 무시당했기 때문에 늘 혼란스러웠다. 엄마가 행사했던 과거 영향력 때문에 성인이 됐지만 쇼핑하는 일에 참 애를 먹었다. 이 옷이 나와 어울리는 옷인지를 떠나서 내가 좋아해도 되는 옷인지 감이 안왔다. 빽빽하게 걸려있는 옷걸이를  수백번 수 천번 차례대로 넘겨봐도 뚜렷하게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마치 현 상태를 대변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틀리면 어쩌지?' 뭐가 예쁜 옷인지 조차 모르겠었고, 언제나 남들이 맞는다고 해줘야 비교적 합당한 선택이 되는 것 같았다. 애초에 패션 전문가도 아니고 못 입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정답을 찾으려 발버둥 쳤을까.


 20대를 통틀어서 혼란스러웠던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택을 주도적으로 하고 그 선택을 믿고 감당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늘 부정당했기에 확신을 가질 틈이 없었다. 취향처럼 인생에도 정답은 없다. 자신이 한 선택만이 있을 뿐이고, 그 선택을 감당하면서 사는게 다라고 모 개그맨이 말했다. 생각과 고민은 참 많이 했다. 눈 떠보니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이 됐더라.


‘마음 속에 답은 정해져 있는 데, 마주해야 할 현실이 두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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