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_<작은 땅의 야수들>
작은 땅의 야수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작가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듣고, 나는 이 책이 이 땅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일 거라 추측했다. 역시 이 책은 일제강점기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현대사의 암울했던 시기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 독립운동가의 애국심이나 목숨마저 아까워하지 않은 위대한 삶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혹한 시절, 거친 땅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사랑이야기. 혹은 평생 지키고 싶고, 혹은 살아갈 이유가 되고, 혹은 사무치게 아프고, 혹은 일생토록 고마운…….
소설은 기생 출신의 배우이자, 무용가였던 옥희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가난한 집 맏이로 태어난 그녀는 집안 살림의 밑천이 되고, 입 하나를 덜어주기 위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기생집 하녀로 팔려가게 된다. 어린 나이지만 직감적으로 자신이 가족에게 해 줄 수 있는 역할이 그것뿐 임을 안 그녀는 그 운명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다. 아니,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 하녀로는 받아줄 수 없다는 주인의 말에 차마 딸을 기생으로 팔 수 없어 발걸음을 돌이키던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기생이 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주체적 결정이었이다.
이후에도 그녀는 그렇게 주어진 삶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전 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그녀는 근대적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기생이란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또다시 그 기생이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배우로, 무용가로, 또 해녀로 계속 꿈꾸고 변화하며 살아간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많은 여성들처럼 그녀는 안정된 삶을 위해 집안에서 맺어주거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기생이란 신분 덕분에 오히려 성적으로 자유로워진 그녀는 함께 할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를 꿈꾼다. 물론 그 꿈은 시대적 한계와 상대의 보수성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못 이룬 꿈을 차선을 통해 이루려 하기보단 혼자 남길 선택한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맡기길 거부한 것이다. 설령 미래가 불확실하더라도 의존적인 삶보다는 자신에게 솔직한 삶,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생’이란 직업으로 묶여있는 그녀들은 일종의 여성연대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남성에게 구애된 삶이 아니라 남성을 선택하는 삶을 살며, 설령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지키며 산다. 이 녹록지 않은 삶에서 그녀들이 도움을 주고받고 의지하는 곳은 오로지 자신들의 연대이다. 그 안에서 개인적인 삶을 살고, 또 사회적으로 자신이 이바지할 수 있는 일에 몸담는다. 예컨대 소설에서 은실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자금을 댄다거나, 단이가 기생들의 연합체를 움직여 3.1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수동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앞장선다.
이 소설에서 수동적인 쪽은 오히려 남성들이다.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정호는 가난한 사냥꾼의 아들이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모를 아버지가 남긴 유품 두 점이다. 맨 몸으로 길에서 생활하는 그를 좀 더 나은 삶으로 이끈 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 옥희이다. 옥희라는 존재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만이 삶의 과제였던 그가 좀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되고, 이명보라는 독립운동가를 만나 독립운동에 몸 담게 된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애초에 그에게 어떤 신념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과 스승을 위한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들 중 독립운동을 하는 이는 정호가 유일한데, 이것이 우연이 만들어낸 상황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다. 작가가 보는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지점이다. 사실 당시 사람들에게 빼앗긴 나라는 이미 현실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제에 이미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 태어난 이들에게 나라를 빼앗은 이들에 대한 분노나 조국을 지키고자 하는 결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에서도 애국심과 독립에 대한 의지는 은실, 명보, 단이와 같은 앞세대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뒷세대 인물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가혹한 상황 속에 살아남는 것이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와 같이 독립운동에 몸담은 젊은이들의 의지와 용기가 더욱 위대한 것이다.
옥희의 연인이었던 한철은 언뜻 보기엔 자신의 삶을 개척해 마침내 성공을 이루어 내는 매우 진취적인 남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삶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의 삶은 온전히 여성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먼저 그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준 그의 어머니가 있다. 소설에 많이 언급되진 않지만, 한철이 가부장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늘 관습적 선택을 하게 되는 데에는 그의 어머니의 역할이 지대하다. 몰락한 벌열가에서 태어나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삶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철에게 어머니는 그의 가치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철이 독립된 한 성인으로 서는 것 또한 스스로의 힘이 아닌 여성의 힘을 빌려서였다. 그가 사랑한 옥희는 그의 생활비와 학비를 대줌으로써 그가 성공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결혼이란 삶의 다음 단계를 선택함에 있어 한철은 그녀가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또 그의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거란 이유로(이 소설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진 것은 오히려 남성 쪽이다), 그녀를 버리고 친일파로 일본의 작위를 받은 가문의 딸 서희를 선택한다.
결국 그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다. 옥희의 헌신과 친일파였던 처가의 도움을 얻어서 말이다. 하지만 성공한 그는 그 성공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려 한다. 작가는 이러한 그의 위선을 소설 말미에서 보여주는데, 한 여기자와 오만한 태도로 인터뷰하는 그의 모습과 재회한 옥희와 대면하며 한없이 미안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에게 옥희는 숨기고 싶은 과거이자, 보잘것없고 위선적인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소설에서는 이 외에도 시대적 인물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독립운동가인 이명보이다. 남자 주인공인 정호가 하층민으로 독립운동가가 되는 사람들의 시대적 표상이었다면 명보는 벌열가에서 태어나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시대를 아파하는 양심적 지배층이다. 소설 속에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몸과 재산을 바쳐 평생 독립운동과 민중의 삶을 생각한 유일한 이가 이명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혹독한 일제강점의 시대에서는 오히려 살아남았으나 결국 좌우대립이란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의 손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김성수는 일본에게서 작위를 받은 친일파 가문에서 태어나 그걸 당연하게 누리며 사는 인물이다. 오로지 개인적으로 안락하고 쾌락적인 삶만 추구하므로 자신이 물려받은 사회적 위치나 자신이 행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관심이 없다. 우연히 자신에게 순수한 쾌락을 주는 여성에 이끌려 3.1 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해방 후 친일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을 벗고 애국지사로 재탄생하게 된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자기 민족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이명보와 대척점을 이루며 대한민국의 근대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비극적인지 보여주는 시대적 표상이다.
하층민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정호가 있었다면, 하층민으로서 또 먹고살기 위해 다시 자기 민족을 좀먹는 일을 하며 사는 영구도 있었다. 그는 중일 전쟁 이후 극도로 물자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밀거래를 통해 서민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생필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에게 이런 행동은 먹고사는 문제일 뿐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한다.
정호의 친구 미꾸라지는 정호를 이명보에게 이끌어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만, 해방된 조국의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정호를 군사독재 하에서 다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죽음으로 내모는 장본인이다.
이 외에도 소설에는 잔학한 일본인 지배자의 표상인 하야시, 조선인 지배와 수탈을 당연시하는 당시 대다수의 일본인을 대표하는 이토, 역시 조선의 수탈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최소한의 양심으로 자신과 조국 일본이 나아가는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야마다 등의 각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소설은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평범한 삶 속에 대한민국의 거대한 역사를 관통시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역사의 흐름이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그들이 이를 어떻게 마주하며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그 안에는 국봉을 조장하는 어떤 단어나 윤리적 혹은 도덕적 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그저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예전에 일제강점기 말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병, 징용, 혹은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을에 대한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다. 당시 수많은 자료를 보고 내가 결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그들은 그 안에서 또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일상을 살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잔인하고 엄혹한 현실이지만,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것은 일상이다. 그 현재를 어떻게 분노하고 아파하며 고통스럽게 살 수만 있겠는가? 다시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또 사랑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즘 어떤 이들은 당시 사람들이 그런 일상을 살아간 정황만을 떼어내 크게 부풀려 당시엔 누구나 최소한 소극적으로라도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거나, 그 안에서 일제의 근대화의 혜택을 받고 살지 않았느냐고 떠든다. 심지어 위안부에 끌려간 이들에게 조차 그 안에서의 삶 단편만을 꺼내어 그들이 자발적으로 생계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내야만 했던 상황과 역사적 평가를 헷갈려하는 것이다. 일반 백성이 그 안에서 생존해야 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 모두를 역사란 이름으로 단죄한다면 당시를 산 사람 가운데 친일파 아닌 이는 한 줌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의 혜택을 누리고 산 사람이나, 사회 지배층의 지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자들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 또 하층민이지만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한 자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역사적 평가가 따라야 한다. 이제와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밝히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해 좌우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평가와 포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런 일들은 해방 직후 이루어졌어야 했던 일이지만 분단과 독재 아래 우리의 역사적 평가는 왜곡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제 좌우를 떠나 당시 사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역사의 왜곡을 되돌려 놓는 일이다. 이제 당시를 살았던 이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런 일들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이다. 다행히 근래 여러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런 평가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뉴라이트라는 집단의 반동으로 잠시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여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시점에 이런 소설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당시를 살아간 평범한 삶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재미있게 환기시켜 주고, 역사에 대한 반동적 평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이 소설은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쟁과 평화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하소설이면서도 개인의 삶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야말로 요즘 소설이다. 개인적으론 소설이 전체적으로 생기 있고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30대 젊은 여성 작가의 분위기가 필체에 묻어난 것이리라. 한강에 이어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김주혜 작가께 감사를 표하고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