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_사랑스러운 아이를 기른다는 것

맹자 이루 하 역자이교지(易子而教之)장

by 주루주루

나는 아이가 없다. 그래서 삶의 가장 힘든 일이면서 특별할 것이라 추측되는 경험, 즉 한 사람의 자아를 성장시켜 주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는 한 편으론 삶을 매우 평온하게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삶에 있어 어쩌면 가장 큰 가르침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나의 경우 의료기술을 사용해 아이를 가지는 일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그나마 조카가 있어 단편적으로나마 가끔 간접경험을 하는데, 그때마다 오히려 엿보기만 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이 조카는 언니가 늦깎이로 얻은 4살 배기 아들이다. 아직 조그만 아이이지만 존재감은 우리 집안 모든 어른보다도 크다. 얼마 전까진 아직 입이 트이지 않아 불편할 때마다 빽빽거리며 울어 옆에 있는 사람을 공황상태로 몰더니, 말을 하기 시작하자 하루종일 큰 소리로 중얼거려 옆에 있는 어른 귀에 피가 날 지경이다. 가끔 보는 사람들도 이런데 하물며 종일 붙어있는 아이 엄마는 어떨까? 언니의 육아 과정을 보면 참으로 고되기 그지없어서 세상에 이보다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싶다. 퇴근도 없고, 범위도 없는 데다 난이도 갑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합쳐져 있는데, 어디 잠시 쉬러 숨을 수도 없고, 그만둘 수도 없다. 덕분에 원래도 여리여리한 몸을 가졌던 우리 언니는 육아 이후 5kg가량이 빠져 지금은 피골이 상접했다. 하지만 아이가 잠들고 잠깐 주어지는 고요의 시간이 찾아오면 언니는 아이를 위해 다시 아이 식사를 만들고, 육아 서적을 보고, 촬영해 둔 아이 사진을 보며 아이에게 소홀했던 잠깐의 순간을 반성하곤 한다. 도대체 아이가 주는 행복이 무엇이길래, 그 아이가 어떤 의미 이길래 엄마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 언니의 육아는 다음 단계를 앞두고 있다. 드디어 조카가 어린이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감동의 그날은 올 3월 2일인데, 입원이 확정되자 그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면서 육아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해 있다. 바로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계 맺기를 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 집에 가면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것들이 있긴 하겠지만, 갑자기 변한 상황에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도 어느 정도 사전 훈육이 필요하다. 사실 이 훈육은 한 6개월 전쯤 아이가 말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옆에서 지켜보니 이 또한 쉬운 게 아니다. 지금까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던 엄마, 아빠가 이제 주변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통제하게 된 상황을 아이가 순순히 받아들여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혼돈의 과정을 바라보다 문득 맹자에 나오는 한 구절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教者必以正 以正不行 繼之以怒 繼之以怒 則反夷矣 夫子教我以正 夫子未出於正也 則是父子相夷 父子相夷 則惡矣

자식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바른 것으로써 가르치는데, 바른 것을 가르쳐도 아이가 행하지 않으면 화가 나게 되고, 화를 내게 되면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아버지가 나에게 바른 것을 가르치지만, 저렇게 화내는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이는 부자간에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부자간에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면 서로 싫어하게 된다.


父子之間 不責善 責善則離 離則不祥 莫大焉

부자간에는 잘한 것인지를 따지지 말아야 하니 잘한 것인지를 따지게 되면 서로 멀어지기 때문이다. 부자간에 서로 멀어진다는 것은 불행한 것이니, 삶에 있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없다.


유학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와의 거리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여기서 나와의 거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한마디로 정리해 보면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만나게 되는 사람의 순서라고 보면 될 듯하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이가 부모, 그다음은 형제, 그다음은 친척, 그다음은 친구와 스승, 그리고 지인, 모르는 사람……. 누구나 이렇게 인간관계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거친다. 이 순서에 따라 사랑의 크기가 작아지고,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작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가장 가까워야 하는 사이는 역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이 둘 사이는 더할 수 없는 사랑으로 맺어져 있어 정의(正義)도, 이해(利害)도 끼어둘 수 없다. 가령 내 자식이 살인의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부모는 자식을 신고할 수 없으며, 부모가 같은 죄를 저질렀어도 자식이 부모를 신고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라도 작은 일로 틀어져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는데, 그래서 부모자식 간에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가정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맹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을 다음 구절과 같이 제시한다.


古者易子而教之

옛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조선시대까지 우리 사회는 아이의 교육을 부모에게 오로지 의존하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엄마의 역할이 아이에게 지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엄마가 편히 머물며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외가에서 아이의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외가에 기거(아이의 아빠도 포함이다)하며 외조부와 삼촌들에게 기본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사촌들과 어울리며 또래 간에 어울리는 방법도 터득해 나간 것이다. 자식을 외가와 함께 기르는 것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육아를 돕는 외조부 혹은 외조모만 존재한다는 점이 좀 다르다 하겠다. 그렇다 보니 훈육보다는 사랑에 좀 더 치우치게 되는 것 같다. 여기에 출산율 저하라는 사회적 현상이 더해지면서 아이가 더 귀하게 여겨지고, 사랑이 과보호로 흘러 자칫 아이에게 너무 비대한 자기애를 심어주는 경우도 왕왕 보인다. 그렇다면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맹자의 윗 구절의 핵심을 가져가면서 지금 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의 양육방식은 훈육에 조금 더 방점을 두어서 채벌로써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시대의 엄격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방식이라 생각되는데, 그것이 80년대까지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이어져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동학대라 여겨질 만한 일이 가정에서 또 학교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나 역시 아버지의 채벌이 나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무언가 아버지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때가 있었고, 학교에선 내가 직접 당하진 않았지만, 자기 화에 못 이겨 감정적으로 무자비하게 학생을 때리는 선생님을 종종 목격했었다. 그런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나는 아버지와는 데면데면 해졌고, 사회적으론 선생님의 채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요즘 학부모들의 과도한 선생님에 대한 불신은 아마도 이러한 성장기를 거친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결국 훈육에 방점을 두는 방식은 실패한 교육법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방점을 두는 방식은 어떤가? 요즘은 아이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나처럼 아이가 없는 경우 공공장소에서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한다고 아이의 행동에 가급적 제재를 가하지 않는 상항에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양육자의 이야길 들어보면 엄마는 아이가 우선이기에 아이 중심으로 생각해 주변사람들이 아이니까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나서서 참견하기 싫어서 참는 것인데 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새로 등장한 신조어가 바로 ‘맘충’과 같은 단어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에 방점을 두는 방식도 결국 실패한 교육법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 사회화시켜야 할 것인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다만, 아이의 자율성 존중이 아이의 자기애를 비대하게 하는 데까지 가면 안 될 것 같다. 맹자의 말처럼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제재를 가하고,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교육을 맡긴 후에는, 누가 봐도 아동학대라 할 만한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 교육기관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지금과 같이 맘충이 출현하고, 교권이 추락한 시대를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의 적당한 제재라는 말이 조금 추상적인 이야기 같아서 보충하자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행동을 할 때 제지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그러면서 화내지 않는 것이다. 아이에게 화를 내며 말하게 되면 그 화가 나의 안에 있는 피로와 합쳐져 분노를 부르고, 결국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아이를 기르지 않지만, 우리 엄한 아버지가 어릴 적 나에게 왜 그렇게 심하게 화를 냈을까를 생각해 보며 나름대로 그 메커니즘을 연구한 결과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쓸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지도 않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 비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아이와 또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이해도가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부디 내 아이가 주는 사랑의 늪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아이를 잘 길러주길 바라며, 그 극한의 어려움을 딛고 육아를 하는 모든 부모를 응원한다.


* 이번주부터 글 연재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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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