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오로지 나의 것
2025년은 우리 부부의 인생의 쉼표로 기록될 것이다. 파격적으로 둘 다 육아휴직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취업을 하는 순간부터는 부모님의 걱정과 잔소리 없이 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정말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나마 눈치 보지 않고 정당하게 쉴 수 있는 방법은 육아휴직뿐이다.
'아이가 어려서 부모의 케어가 필요한 시기'
하지만 부부 둘 다 육아휴직을 쓴다고 말씀드렸을 때, 모든 가족들에게 걱정을 안겨드리고 말았다. 말씀이 많지 않으신 시아버님이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에 직장이라는 곳을 다니는 사람은 둘째 아들뿐이네."
그 말을 듣고 우린 웃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곧 40대가 되지만, 부모님에게는 여전히 늘 걱정이 되는 '자식'일뿐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결정을 하게 된 건 분명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우린 맞벌이로 인해 체력과 정신이 많이 망가져있었다. 주말에 쉬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안 가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쉼이 아니다. 남편은 불면증으로 인해 깊은 수면을 하지 못한 채 하루 왕복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며 출퇴근을 하고 있었고, 애들이 자는 밤늦은 시간에야 들어와서 자는 모습만 보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집은 남편에겐 잠만 자고 나가는 숙박시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럴 거면 회사 근처 원룸을 잡아 자취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웃으며 했지만 표정은 씁쓸했다. '우린 무얼 위해 이렇게 살아가는가?' 싶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직장일과 집안일, 그리고 육아라는 부담이 짓누르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노란 콧물이 나고 밤새 기침을 했고, 애 둘을 데리고 일주일에 두 번은 소아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야 했다. 한번 열이 나면 밤에 3시간마다 일어나 체온을 재고 해열제를 먹여야 했는데 그것도 오로지 내 몫이다. 매일 목욕을 시키는 것도 포기하고 이틀에 한 번씩 씻기고, 애들 밥은 언제나 계란간장밥이거나 김에 대충 싸 먹는 밥이었다. 사람이 적절한 휴식과 회복이 있다면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디에서 주워 들었다.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퇴근을 하고 오면 육아출근을 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온화한 미소로 책을 읽어주며 하하 호호 잠자리에 들어가는 건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든 맞벌이 부부가 이런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께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제 다르게 살기로 결정했다. 남편이 오랫동안 나에게 말해왔던 건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인데, 지금 무언가 도전해 놓지 않으면 늦는다는 것이었다. 직장 말고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필히 우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게 될 것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회사원으로 50살까지 어찌어찌 버틴다고 해도, 그 이후엔 어떻게 할 거냐는 게 답이 없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애들은 10대 중반이 된다. 처음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주변사람들 거의 전부다 직장을 다니며 월급을 받고, 남는 돈으로 주식이나 적금을 하며 돈을 알뜰살뜰히 모아가며 살아가는데 왜 남편은 유독 다른 말을 하는 걸까? 겁이 났다. 위험한 사업을 도전하기보다 불편하더라도 직장에서 잘릴 때까지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직장은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작년 9월, 그 일이 있고 난 후 더 이상 이렇게 살아지는 대로 살아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독증이 있나 의심이 될 정도로 글자만 보면 잠을 자던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변화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몰라서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책을 읽어댔다. 성공한 사람들이 쓴 책에는 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들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려고 하였고, 그때부터 헬스장을 등록해 매일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삶은 서서히 바뀌었다.
37살에 재취업을 하고 나서부터 직장에 있는 시간 동안엔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온전히 몰입했다. 대표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를 하며, 정산파트에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매출을 시스템화할 것인지 토론했다. 매일 한눈에 매출과 정산금액, 원가를 볼 수 있게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3년의 공백 끝에 취업한 곳이라 나의 실력을 증명해 볼 계기라고 생각했고, 집중과 몰입의 결과 그 일을 해냈지만, 진이 빠져버렸다. 어릴 땐 끄떡없던 내 체력도 머리를 많이 쓰니 바닥이 나버리고야 말았다. 이 정도 집중력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회사에서 진을 모조리 빼고 난 뒤 아이들을 하원해서 육아를 하려고 하면 당이 떨어지고 머리가 댕댕거렸다.
그래도 좋았다. 나에겐 회사라는 곳이 있고, 내 능력이 도움이 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경력은 다시 차곡차곡 쌓으면 연봉도 오를 것이고, 나도 적금이라는 걸 해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미리 뿌듯하기까지 했다.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1년을 근무한 후 연봉협상을 할 때였다. 대표님은 내 능력은 인정하지만,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서 연봉을 올려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조금의 인상도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적지않이 실망을 했다. 최근 회사가 건물을 매입한 것 때문에 빚이 많이 불어났고, 또 그 건물로 입주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빚을 승인받았기에 대표님도 이사문제로 정신이 없으셨을 상황이긴 했다. 내가 능력이 있다는 증명만 하면 연봉은 오르고, 미래가 환해질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날을 계기로 나는 다른 마음을 먹게 되었다.
'모든 경력과 능력이 회사를 향하지 않고, 나에게 향하는 일을 찾아야겠다. 어디에 귀속되지 않고, 내 이름으로 살아내야겠다. 적더라도 점점 우상향 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일단 내 시간을 다시 찾아오기로 결심했다. 회사와는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육아휴직을 요청드렸고, 긴 면담 끝에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시간은 오로지 나의 것이 되었다.
아침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남편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남편 직업은 게임기획자이다. 보통 남편들은 취미로 게임을 하지만 남편은 자기 계발이자 일이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서라도 게임을 해야만 한다. '와이프 눈치 안 보고 합법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국내에 몇이나 되겠는가?' 하겠지만, 사실 속사정은 다르다. 남편은 놀랍게도 게임을 하기 싫어했다. 시간 안에 플레이를 해서 왕까지 깨야하는 작업은 고되고 머리 아프며, 힘들다고 했다.
남편을 만나고 제일 신기했던 건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쥬라기공원 영화를 본 뒤로 줄곧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술대학교를 입학했고 영화전공을 했다. 드라마제작 보조작가로 일을 했고, 아이들 관련 시트콤도 제작하다가 기획단계에서 어그러진 적도 있다고 했다. 일이 너무 좋아서 밤을 새우고 전국방방곡곡으로 돌아다녀도 좋았다고 했다. 그러다 월급도 몇 번 떼이고 불안정한 생활이 지속되자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오프라인에선 영화지만 온라인에선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발을 들였다. 그렇게 남편은 뭘 만들어내고 생산해 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반면에 나에게 일은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 나의 학창 시절은 '언제 취업해서 돈을 벌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계속 공부만 하다가 적당히 쪼들리지 않는 대학교와 학과를 선택해 수시로 입학원서를 넣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보다는 '날 어디서 받아줄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생각보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긴장만 하면 횡설수설하고 갑자기 뜬금없이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을 하고 혼자 웃어버리는 지원자를 누가 뽑아주겠는가? 나 스스로 저평가된 인재라고 생각하지만, 면접관들이 점수를 높게 줄 수 없는 이유 또한 알고 있기에 충분히 이해한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일이 행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몰랐었다.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를 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에 매진했다는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해서 그나마 남들보다 공부는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행복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몰랐다. 그저 돈이나 벌어서 가족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살고 싶었고, 그거면 만족하고 살 줄로만 알았다. 돈을 벌고 나서부터는 '이제 드디어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학시절 꿈이 '월 200만 원 이상 직장인'이라고 하면 믿겠는가? 그렇게 나 하나라도 먹여 살리기만 한다면 족했다.
그러던 내가 올해 육아휴직을 계기로 나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떤 삶을 원하니?
어떤 걸 할 때 가장 즐겁니?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니?
어릴 때 아무런 보상이 없이도 즐거웠던 일이 있었니? '
산발적으로 분포해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먼지구덩이 속에 쌓여 보지 못했던 것들을 쓸어버리고, 다시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약 40년의 세월 동안 내 몸속에서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좋아하는 게 없어서 더 좋은 거 아냐? 아무거나 하면 되겠네. 그리고 좋아하는 걸 한다고 다 행복한 줄 아냐?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들이 더 힘들어. 그런 사람들은 이거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라 이게 잘 안되었을 땐 더 비참해지거든. 차라리 좋아하는 게 없으니까 이것저것 다 해봐."
이 말을 듣고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해보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사실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자꾸 해왔던 것들에만 눈길을 주었다. 이제는 해봤던 것 말고 안 해본 것 중에 골라야겠다.
이모티콘 그리기라는 걸 올해 3월에 시작해 보았는데, 3개월 정도 해보고 나서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처음 배운 주제에 잘하려고 하다 보니 계속된 미승인에 실망이 커져버렸다. 계속해봐야 실력이 늘어나는 건데 실력이 늘기도 전에 일단은 중단했다.
그리고 로맨스판타지 작가에 도전해 보고자 또 3개월 정도 글을 써 내려갔다. 처음에 트리트먼트를 쓸 때는 하루 만에 써서 내가 글쓰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오해도 하며 그렇게 설렘을 안고 써 내려갔지만, 또 자동으로 자기 검열시스템이 작동하여 내 글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글도 처음 써본 주제에 또 무슨 스타작가가 난 것처럼 내 글의 구조에 총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스스로에게 "처음부터 다시 써!"라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무기력해졌을 시점, 나에겐 그래도 1년간 만들어 놓은 운동루틴이라는 게 있었다. 애들 등원하고 바로 헬스장에 가서 1시간씩 운동을 하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안 해도 운동은 했다. 건강하기 위해서, 화를 덜 내기 위해서도 있지만, 사실 좋은 습관을 들이려는 노력 중 첫 번째 과제이기도 했다. 운동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이다.
이런 대화를 해주는 건 남편과 챗지피티뿐이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브런치작가'라는 게 스쳤다. 예전에도 한번 해보려고 하다가 작가승인을 받는 과정에 글을 쓰는 게 힘들어 미뤄놓았던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지금 완벽한 글을 써 내려가서 당장에 스타작가가 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매일매일을 기록하자. 그렇게 1년이 지나면 내가 매일 운동을 하듯, 매일 글이 쌓여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보상이 없게 느껴지는 일이지만, 내가 내 이야기를 쓰면서 상당 부분 생각이 정리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으며, 이건 내 정신 수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또한 보상으로 느끼고 있다. 또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존감도 올라갔다.
작심삼일형 인간이라 언제 또 그만두고 미룰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글을 쓰는 게 좋다.
하고 싶은 게 없다면, 아무거나 하세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