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흑역사 썰 푼다
나의 육아 모토는 '아이들이 나처럼 크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 면접 때 과도하게 긴장을 해서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남들보다 좀 부족할 뿐.
삼성화재 인턴을 마치고 4명의 면접관 앞에 혼자 앉아있었다. 아침에 미용실에서 5만 원이나 주고 아나운서 스타일의 단정한 머리를 하였다. 처음 산 20만 원대의 정장이 부담스러웠지만 삼성화재만 입사한다면 이깟 돈은 적은 금액에 속한다며 엄마카드로 긁어 옷도 장만했다. 4명의 남자가 나만 보고 있다는 사실도 부담스러운데 내 전신이 책상이나 어딘가에 가려진 것이 아닌 전부다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어 더욱더 긴장이 되던 참이었다.
"취미를 등산이라고 적으셨는데 가본 산중에 가장 높은 산은 어디인가요~?"
매우 단순한 질문이었다. 취미와 특기 같은 건 안 키우고 학창 시절 공부만 했던 사람인지라 그나마 아빠와 매주 갔던 등산을 떠올렸고, 주야장천 미륵산만 다녀왔던 나로서는 '높은 산'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짧게 머리를 굴렸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식은땀이 나고 얼굴은 빨개졌다.
"한라산입니다"
그때 바보같이 초등학교 때 갔던 제주도를 떠올렸다. 분명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을 가봤다. 등산이 아니라 한라산 아래에서 산책하고 놀았던 기억에서 한 대답이었다. 대답을 하고 곧이어 생각했다.
'망했다.'
한라산이라는 대답에 놀라시며 등반하는데 몇 시간이나 걸렸냐고 물으셨다.
"약 두 시간 정도요"
역시나 망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는 뜻입니다요.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등산으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인재가 삼성화재 인턴으로 와있었다는 사실에 면접관님들도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삼성의 인턴을 하기 위해서는 SSAT라는 인적성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흡사 아이큐테스트 같기도 한 문제들이 많았다. 주사위를 뒤집어 놓고 보기에 같은 도형을 고르는 문제처럼 사고력, 문제해결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도 있었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휘력이나 사회성도 보는 영역도 있었다. 그런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정상지능일 것이라는 추측이 될 것이라고 생각들 하셨겠지만, 그래도 세상은 참 다양한 사람이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걸 면접관님들도 배우셨겠다 싶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을 걸러내라고 면접이라는 게 있는 거구나'
하며 나의 흑역사를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나는 과도하게 긴장한 채로 살아왔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걱정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딸들은 보통 엄마의 인생을 닮는다는 말이 제일 무섭다. 나처럼 쭈구리로 살아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루 종일 거기에 매달려 책을 읽고 유튜브로 명사의 강연도 들으며 연구할 정도로 '행복한 뇌'를 만드는데 집착한다.
"야!!! 그렇게 하지 말랬지!! 몇 번을 말해!!"
우리 집의 음향효과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하루 1회 이상의 나의 샤우팅이다.
"내 말이 안 들리니?? 혹시 못 들었니?"
화를 강하게 억누른 채로 입술을 깨물며, '안 들려서 대답을 안 한 거라면 그래도 내가 이해해 줄게'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완전히 이성과 감정이 따로 노는 이중인격자였다. 머리로는 온화하고 사랑이 가득하며 넓은 아량과 이해로 보듬어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가슴 안에 미친 사람을 숨기고 사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연애 때도 나는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싸움도 어차피 못해서 안 하는 사람이었다. 말로 하면 되지 왜 화를 내는가? 우리는 나름 배운 사람으로서 대화로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고, 그런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성숙함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초 남편이 그랬다
"이제 더 이상 안 되겠어. 너 병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일전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나 보다.
"주변에 우울증 약 먹는 엄마가 있는데 약을 먹으면 아이와 남편한테 관대해지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대. 아이가 예뻐 보인대."
내가 신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눈이 반짝거리니까 남편이 그랬었다.
"너는 우울증이 아니라 게으른 거야.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잖아."
나를 다 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남편이 이젠 정신과를 권유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화를 내고 아이가 근처에 오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있던 적이 있었다. 아이가 내 몸에 기대고 내 팔을 만지는 걸 냉정하게 뿌리치며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매일 그런 건 아니고 내 마음속 인내심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가끔 그랬다. 이런 행동을 하는 나에게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지만 나도 사람이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육아를 매일 온화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과도하게 눈치를 보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인정욕구가 강한 나처럼 키우지 않기 위해 우리 애들에게 엄청난 공을 들이며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우리 애들을 나처럼 만드는 건 나였다.
첫째 딸 제리가 킥보드를 가지고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 나는 둘째를 안고 둘째 킥보드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에 첫째를 도와줄 손이 없었다. 나는 내려서 걸어가는 거라고 알려주었고, 제리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다가 갑자기 킥보드가 넘어졌다. 그때부터 제리는 긴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공포 가득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
"천천히 세우고 바퀴를 굴려봐"
라고 말했는데 신호등 시간이 점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더더욱 무서워하며 정신을 못 차렸다. 내가 면접관 앞에서 느꼈던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차들이 쌩쌩 달려올 것처럼 무서워했다. 결국 내가 하라는 대로 바퀴를 굴려서 신호등 시간 내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내가 결국 나 같은 사람으로 키우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