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돈의 가치
시간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남편과 돈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아내
부부 동시 육아휴직을 하며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올해,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다.
보라카이 , 보홀 , 제주도 , 그리고 곧 떠날 푸꾸옥
그러면서도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할 때마다 망설여진다. 여행을 갔다 오면 무엇을 얻게 될지, 무엇을 잃게 될지 생각하고, 계산하며 걱정인형이 된다.
여행의 장점은 첫 번째로 아빠가 아이들과 친해졌다는 점,
두 번째로 애들이 감기에 쉽게 걸리지 않는 체질이 되었다는 점이고,
세 번째로 아이들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는 점이다.
남편은 둘째 아이 태어나고 나서는 거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었는데, 그 점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저녁에 퇴근하고 오면, 아이들은 자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점점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고, 아빠를 어색해했다. 결혼하기 전에 남편은 무조건 '가족이 중심이다.'라는 말을 했었고, 그걸 최대한 지켜왔지만, 아무래도 가장의 무게 때문인지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일에 더 매진하게 되었다. 애가 둘이 되었을 때, 엄마와 아빠는 둘 다 더 강해져야 했다. 애는 둘이라 육아 난이도는 더 올라갔지만, 남편은 육아를 할 시간이 더욱 없어지고 있었다. 육아휴직 초반엔 아무리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도 애들이 먼저 아빠에게 가지 않았는데 10개월쯤 지나자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엄마 아니면 같이 안 잔다는 애들이 한 번씩 아빠침대에서 자겠다고 할 정도로 많이 가까워졌다. 아이들에게는 같이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희한하게 따뜻한 동남아에 갔다 와서 그런지 애들이 감기도 잘 안 걸리게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애 둘 다 일주일에 두 번씩 이비인후과를 가서 항생제를 처방받아 올 정도로 감기가 안 떨어졌다. 노란 콧물에 열감기에, 중이염에, 기침하다 이불에 토하기 일쑤였기에 원래 원생활 하면 이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병원에 간 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다. 애들이 6살, 4살이니 이제 많이 커서 감기에 안 걸리나 싶다가도 첫째 제리가 5살 때까지 감기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꼭 나이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동남아 여행에서 받은 햇빛에너지로 인해 건강해진 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증거는 없지만 말이다. 동남아가 병원이 잘 안 되어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병원에 갈 이유가 없었다.
엄마, 아빠가 사회생활을 하듯, 아이들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도 엄마, 아빠와의 여행으로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삶의 긴장도가 많이 완화된 게 느껴진다. 여행 가서 하루 종일 수영하고, 해변에서 모래놀이하고, 자연을 바라보며 '세상은 살기 좋은 곳, 행복한 일이 많은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또한, 여행이라고 하면 불편하고 힘든 점도 있을 테지만 애들이 나름대로 그걸 견뎌내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 보라카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둘째 티커가 "엄마 나 어린이집 가고 싶어. 어린이집은 왜 안 가?"라고 하며 계속 보챘고, 첫째 제리는 "집에 가고 싶어. 여기 불편해."라고 해서 '아이들도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불편한 걸 아예 없애주기보다는 불편함도 계속 견디다 보면 이겨낼 수 있는 걸 가르치고 싶었다.
처음엔 신발 속에 모래가 조금만 들어가도 불편해했고, 파리가 다가오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바다에서 조금만 이상한 냄새가 나도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고, 파도를 무서워했다. 수영장 물도 무서워서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불편한 모든 것들이 익숙해졌고, 적응해가고 있었다. 가수의 라이브공연을 처음 보며, 그 앞에서 춤을 췄고,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영어로 말 걸면 당황하다가도 간단한 영어를 생각해 내서 대답하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 시키는 걸 힘들어하는 제리가 외국인 친구에게 "Where are you from?"이라고 처음 말하는 용기도 내었다. 수영장에서는 말이 안 통해도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같이 놀았다. 어떤 경험이 제리를 좀 더 마음을 넓게 만들어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순간을 지켜보고 나서 제리를 보면, 그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제리의 경우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잘 받는 타입이어서 걱정이 많았다. 미세한 표정변화와 감정을 잘 읽는 아이라서 상대방의 기분을 금방 파악하곤 하는데, 그게 인간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웬만한 갈등은 엄마한테 말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을 때, 선생님이 제리 괜찮냐며 나에게 전화해서 걱정하셨지만, 정작 제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 너랑 같이 안 앉을래!"
라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듣고 그 당시엔 울었다고 하지만 내가 제리에게 물었을 땐
"아 오늘 그랬었는데 이젠 괜찮아."
라고 대답하더라. 여렸던 제리가 회복탄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여보, 확실히 제리가 정말 단단해진 게 느껴지지 않아? 애가 이제 친구들과 어떤 문제가 생겨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스스로 이겨내는 게 보여. "
남편과 대화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같이 보낸 시간이 헛것은 아니었구나.
2주 뒤면 푸꾸옥으로 떠나는데 남편이 어제 나에게 급 여행제안을 했다.
"요새 날씨도 좋으니 내일 애들 데리고 1박으로 캠핑 가는 거 어때?"
"아 우리 2주 뒤에 베트남 가는데 또 여행을 가자고? 애들 수업도 있고, 빠지기 아까운데."
"앞으로 나 복직도 하고 시간도 없을 텐데 애들 데리고 더 추워지기 전에 캠핑 가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서."
한참 생각하고 말을 꺼냈다.
"그래 가자!"
솔직히 확 당기진 않았던 게 여러 가지 걱정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여행을 간다는 건 수업을 빠진다는 기회비용이 생겼고, 아이들도 올해는 여행을 많이 다녔으니 어느 정도는 수업에 집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건 돈이었다. 아무리 1박 여행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여행을 가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게 되고, 특히 가족들이 '저렇게 한심하게 놀러만 다니나?'라는 생각을 할까 봐도 두려웠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남편의 말을 수락하게 된 건 남편이 복직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시간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 여러 가지 고려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활용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맞벌이 부부는 연차를 함부로 여행으로 썼다가는 정작 아이들이 아파서 써야 할 때 못쓰게 된다. 수족구에 한번 걸리면 최소 5일은 등원하지 못하게 된다. 부모님께도 부탁드리기 어려운 게 어른들도 수족구에 걸리면 고열에 손발에 물집이 잡히는 병이기 때문에 전염되면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5일을 모두 연차로 쓰기엔 회사에서도 맡은 역할이 있기에 부담스러운 일이다. 독감이나 열감기, 수족구, 장염 등 아이들은 기관에 다니면 여러 감염병에 노출되는데 완치되었다는 의사의 확인서가 있어야 다시 등원할 수 있다.
의사결정을 할 때 나는 늘 돈을 선택하고, 남편은 시간을 선택해 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오랜 습관과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인데, 남편은 늘 시간의 가치를 더 우선시해왔다. 맞벌이를 할 때도 애들 아플 때를 대비해 연차를 남겨두자는 나의 의견과는 달리, 갑자기 날씨가 좋은 날엔 반차를 써서 아이들과 서울랜드를 가자고 했다. 나는 남편이 그런 제안을 할 때마다 주저하고 있더라. 하지만 거의 남편의 의견에 따르려고 했다. 늘 '해야 하는 일'에 매진해서 '하면 행복한 일'에 대한 생각을 거의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두렵더라도 다른 선택을 하고 살기로 했기 때문이다. 너무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고, 당장 오늘 웃고, 내일 웃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