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탓 아니야. 잘하고 있어. 괜찮아."
"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퇴근을 하고 들어온 남편이 지친 표정으로 거실을 훑어보았다. 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 이내 문 잠그는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거실에 발 디딜 틈이 없이 아이들의 장난감이 흩어져 있었고, 개수대에는 설거지가 쌓여있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크게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이 무거운 공기를 본능적으로 잘 느낀다. 어릴 적 부모님 눈치를 봤던 것처럼, 몸이 공포에 질린 듯 굳어버렸다.
'아니 왜 화를 내며 들어가? 자기 일할동안 나는 놀았어?'
억울함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저 생각에만 그친다. 머릿속이 쉽게 하얘지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대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
입이 있어도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순간을 기억해 언젠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백 번, 수천번 말하고 다니리라. 당신을 나쁜 남편으로 만들어 복수하고 말리라.'는 소심한 생각만 반복할 뿐이었다.
사실 남편은 내가 아이 발달을 위해 두 개의 종이 곤충을 완성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저 어질러진 집만 보고 압도적인 스트레스를 느꼈다고 했다. 그 장소를 잠시 피하려고 방에 들어간 것뿐, 나에게 화를 낸 게 아니라는 변명 아닌 변명도 들었다. 그러나 남편이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없다. 그때 받았던 충격적인 기억은 이미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었다.
전업주부의 몫은 집안일과 육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자의 몸은 하나이고, 집안일과 육아는 동시에 완벽하게 되기 힘들다. 집안일을 하려면 육아를 잠시 놓아야 하고, 육아를 하려면 집안일을 잠시 놓아야 한다.
설거지를 하면서 책을 읽어줄 수 있는가? 만들기 놀이를 하며 반찬을 만들 수 있는가? 없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완벽하게 해낼 순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업주부에게 묻는다. "집에서 노는 사람이 왜 이런 것도 안 해?"
남편이 퇴근할 때를 맞춰서 완벽하게 깔끔한 집안을 유지하려면,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동안 아무리 청소와 설거지를 해둬도, 아이들이 오면 다시 어질러지기 일쑤이다. '치우는 속도보다 어질러지는 속도가 빠르다.' 게다가 나는 집안일 능력치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일을 하면 집안일 못했다는 핀잔은 안 듣겠지. '
라는 생각이 들어 취업사이트를 매일 들어가 보기도 했다. 실제로 재취업을 했었던 것도 이 핀잔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전업주부로 지내는 동안, 나를 향한 공격적인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살 가치가 있을까? 애들에게 좋은 엄마가 아니라서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
나는 애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자꾸 내가 살아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우울감이 느껴질 때면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나를 학대하곤 하는데, 이것이 학대라는 걸 알아도 멈추기가 힘들다.
다른 사람이 괴롭히지 않아도 스스로 괴롭히고 있으니, 평온하게 살기 참 힘들었겠다. 작은 짜증도 크게 받아들이고, 조금만 뭐라고 해도 겁을 먹는다.
"니들은 왜 지레 겁을 먹니?"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이 작가에게 한 말이 내 가슴에 꽂혔다. 나다. 그 작가의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바로 내 표정이었다.
나는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모든 게 내 탓인 것 마냥 자책을 했을까? 왜 겁을 먹었을까?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이렇게 생각하는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1. 남편의 감정을 나와 분리하기.
‘남편이 지금은 기분이 안 좋구나. 물건들 많은 거 싫어하는 사람이라 힘들었겠네. 이 감정은 남편의 것이지, 내 탓이 아니야.’
2. 나를 변호하며 괜찮다고 말해주기.
‘아이 놀아주느라 집이 좀 더러웠던 것뿐이야. 괜찮아.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네 탓 아니야. 이렇게라도 애들하고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어.’
나를 괴롭히는 생각에 맞서 싸우기.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이제 내 안의 박연진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더는 겁먹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