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딜러가 아닌 힐러로 살기로 했다

누군가의 서브로 사는 것

by 알쏭달쏭

누구의 아내로 불리는 게 싫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면 되는 거니까.


부부 중 한 사람이 잘 되면 '누구의 와이프', '누구의 남편'으로 불린다. 그걸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나는 주인공이든 서브든 잘살기만 하면 된다. 남편이 잘 나가서 내가 'OOO의 와이프'로 불린다면? 오히려 더 좋다.


나에게 잘 산다는 기준은 단순하다. 잠잘 곳 있고, 밥 먹을 수 있고,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것.

입는 옷, 집 크기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더 잘 살고 싶다.'보다는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크다.




남편은 말했다.


"여보, 여보는 욕심이 없어. 물욕도, 돈 욕심도, 연봉욕심도 없잖아. 근데 나는 달라. 돈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야. 서로 잘하는 걸 하면서 살자. "


나는 대답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근데 나도 회사에서 인정받던 사람이었어. 집안일도, 육아도 잘 못하는데... 난 뭘 잘하지? "


"자기는 육아를 잘하잖아. 집안일은 연습하면 되고."


"그렇긴 한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내가 조금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말했다.


"게임에서도 딜러, 탱거, 힐러가 있거든? 딜러는 공격, 탱커는 방어, 힐러는 회복. 내가 딜러라면, 여보는 힐러야. 내가 나가서 벌어오면, 여보는 집이 안정되게 돌아가게 도와주는 거야. 그럼 내가 딜러를 더 잘할 수 있지."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게임을 잘 몰라도 이해됐다. 나는 직장에서 주어진 일은 잘했지만, 사람 때문에 자주 무너졌다. 늘 나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고, 그 피로가 아이들에게까지 번졌다.


그래서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멈춰야 했다. 그리고 가정을 돌보는 일이 ‘쉬운 역할’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물론 불안은 남았다.
‘내 밥값은 하고 싶은 마음’,
‘언젠가 다시 일하고 싶은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딜러로 살아왔는데, 이제 힐러가 될 수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해보기로 했다.
각자 잘하는 걸 하며, 서로의 자리를 믿어보기로. 불안하지만, 이제는 힐러로 살아보려 한다.

그게 지금 나에게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니까.


keyword
이전 07화자기 일할 동안 나는 놀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