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 산문집
기다리면서 나는 쓰고 있다.
여러 활자들이 뭉쳐져 하나의 글이 되어가는 과정을
고요히 보고 있다. 아직 어떠한 내용도 적지 못해 여백으로 남아있는 공간을
볼 때마다 괴롭다. 어떠한 발자국도 생기지 않아 백색의 눈으로 뒤덮인
설경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무결한 색 위에 내 글이 배경처럼 얹어질 때면
기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12월
그간 체념한 일들을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한 달이었다.
작가신청을 하려고 몇 시간 동안 반듯이 앉아 있었다. 쓰던 문장을
이어 줄 다른 문장은 오지 않았다. 무력해졌다.
끝부분이 둥글게 말린 채로 빛을 가리는 암막커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무수한 여백을 뒤덮을 활자들을 하나씩 써나갔다.
한 줄 두 줄 적다 보니 무언가 완성되긴 했다. 완성했으니 이걸 작가신청에 제출하고 싶었다.
승인이 되어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이때 쓴 글이 <어딘가에서 발원된 소설> 외 1편이다.
써야 하는 글을 내려두고 달아나고 싶어질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읽는다.
쓸 수 있는 문장을 골라서 내려두고
쓸 수 없었던 문장을 다듬어서 두고 쓸까 쓰지 않을까를
내내 고민했다. 발을 들인 채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망설이는 문장을 떠밀기. 그래서 발행된 글을 차츰 늘려보기.
마음에 누가 자꾸 장작을 넣었다. 고요하고 황량했던 이곳이 그렇게 타오를 수 있는 곳인지 몰랐다.
몇 번이고 타들어가는 것이 있어야지만
몇 년이고 가물어가지 않아야만
그래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쓰는 시간을 정말 많이 미뤘다.
마음에 오래 묻어둔 이야기를 적고 난 날이면
허무한 마음이 안개처럼 고인다.
소금기를 가득 품은 바다 위에 희게 떠오른
해무를 바라보는 것처럼,
후련해지지 않고 한 꺼풀 막이 생겨서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음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것밖에 없다.
내가 적은 글에 내가 다칠 때면
어딘가를 움켜쥐고 싶어 진다.
꼭 이렇게 아파야만 이어질 수 있는 이야기인가?
이야기를 살아나게 하는 촛불의 심지는 아파서 타들어가고 있는 건가.
아픈 만큼 값진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지 골몰한다.
가물지 않고 꺼지지 않는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무언가 쓰기 전에 이 문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조금은 무너지고 눈물이 날 것 같은 표정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일을 기다리면서 나는 써 내려간다.
맞닿은 문장들을 정렬하고 교열하면서 지금 이걸
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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