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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첨탑에 얽힌 지혜 블루 모스크

알트 Altı와 알튼 altın의 차이

by 조영환

천천히 술탄 아흐메트 광장을 돌아보며, 필자는 일명 '블루 모스크'로 더 잘 알려진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로 향했습니다. 이 모스크는 외관만으로도 그 웅장함이 압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과거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지 싶은데,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건축물이면서 인샬라의 나라 튀르키예에서 보는 첫 번째 모스크여서 인지 더욱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그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적인 중요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건축물은 그 자체로 오스만 제국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 여행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모스크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아름다운 청자 타일, 푸른 돔, 내부에 장식된 아랍어 서예 작품 등은 그 자체로 예술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여행자로 하여금 마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강력한 오스만 제국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서 느낀 감동과 함께, 블루 모스크를 향해 걸어가는 순간, 역사와 예술이 만나는 특별한 경험은 필자에게도 그렇고, 20여 년 세월을 함께 여행한 친구 민수와 원철에게도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지금까지 여행 중 좀처럼 느껴보기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모스크는 그 존재만으로도 도시의 아름다움을 빛내 주었고,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블루 모스크는 아흐메드 1세(Ahmed I)의 통치 기간인 1609년에서 1616년 사이에 지어졌다. 지중해로 떠오르는 햇빛이 모스크내부에 붙인 푸른색 터키석 타일에 반사되며 모스크가 파란색으로 변하는 장관을 연출하는 모습 때문에 ‘블루모스크’로 더 잘 알려진 공식 명칭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이다.


필자가 블루 모스크를 갔을 땐 아쉽게도 모스크 대부분이 복원공사 중이고 많은 부분을 개방하지 않아 블루 모스크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물론 해가 뜨고 모스크가 푸른색으로 변하는 그 시간은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이기도 하니 입장 자체가 어려울 수 있지만, 2017년부터 시작한 복원공사가 코로나로 인한 관광 중단 시기와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 것을 무어라 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 싶다. 이슬람은 08시부터 18시까지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다. 이 다섯 차례의 기도 시간에는 모스크에 입장할 수 없지만,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동안 밤이나 낮, 어느 때라도 시내 곳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블루 모스크는 이스탄불의 상징적인 건축물임에 틀림없는 셈이다. 밤에는 모스크의 다섯 개의 주요 돔과 여섯 개의 첨탑, 그리고 여덟 개의 보조 돔으로 조명이 비치며 그야말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자체로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느껴집니다. 특히, 보스포루스 해협을 운항하는 유람선에서 본 블루 모스크는 압도적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필자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은 마치 도시의 역동적인 숨결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곳을 여행하는 것과 같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늘 말이 없는 친구 원철이 조차 탄성을 자아내며 바라보는데, 이때 우리들 눈에 들어온 블루 모스크는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라, 도시의 영혼과 미적 가치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상징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진 여러 전쟁 중 하나는 1593년부터 1606년까지, 합스부르크 군주국과의 약 15년간 벌인 전쟁입니다. 1593년, 오스만 제국의 시난 파샤(Sinan Pasha, 1506-1596)*의 지휘 하에 헝가리 왕국의 죄르(Győr; 튀르키예어: Yanıkkale)와 코마롬(Komarom; 튀르키예어: Komaron)을 점령했으며, 1595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8세(Pope Clement VIII, 1536-1605)가 이끄는 기독교 동맹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헝가리 왕국을 탈환하려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뺏고 빼앗기는 장기적이고 치열한 전투로 이어졌으며, 어느 순간에는 기독교 동맹이 이스탄불에서 24㎞ 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까지 위협적으로 전진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필자주] 튀르키예어 파샤 paşa는 오스만 제국의 정치 군사 고위 계층에 부여되는 칭호로 이집트에서도 사용되었고 영국의 공작, 백작 등 작위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나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1596년 10월 24-26일에 벌어진 케레츠테스 전투(Battle of Keresztes)는 전쟁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약 5만 명에 이르는 합스부르크-트란실바니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며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도 기독교 연합군의 강력한 저항 속에서 힘겨운 전투를 치러야 했고, 기독교 연합군 또한 오스만 제국 군과의 야전에서 승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전쟁으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는 황폐화되었고, 1606년 지트바토록 조약(Peace of Zsitvatorok)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합스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아내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막대한 국력을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1603년부터 16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 압바스 1세 휘하의 사파비 페르시아와 두 차례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첫 번째 전쟁은 1603년에 시작되었고, 1612년에는 페르시아가 159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잃어버린 코카서스와 서부 이란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아 사파비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두 번째 전쟁은 1615년에 시작되어 1618년에는 양측이 약간의 영토를 조정하면서 끝났습니다. 이러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주목받던 국내외 시선을 돌려 오스만 제국의 자존심과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성소피아성당 Ayasofya에 버금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콘스탄티노플 대궁전 부지에 세우게 된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시기는 330년입니다. 황제 콘스탄티노스 1세는 로마 제국의 동부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튀르키예에 위치한 비잔티움의 중심지인 비잔티온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330년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새로운 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천도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지로서 계속해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천도 이후 콤니노스 왕조 때까지 로마 황제들의 궁전으로 쓰인 콘스탄티노플 대궁전(Μέγα Παλάτιον, Büyük Saray)은 콤니노스 왕조 이후 별궁인 블라헤르네 궁전(Βλαχέρναις Παλάτιον)으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버려진 궁전이 되는데, 이때 어떤 이유에서 별궁으로 옮겼는지는 콤니노스 왕조 시기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역사적인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한 사유와 배경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콤니노스 왕조는 7세기 중반에 흥망성쇠를 겪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왕조를 이끌었던 왕조 중 하나로, 이 시기에는 다양한 정치적 동요와 군사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로 인해 궁전이 이전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튼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제국의 심장이었던 콘스탄티노플 대궁전 부지에 세워진 블루 모스크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신앙을 대표하는 중요한 모스크로 평가받았습니다. 이 모스크는 17세기 초반에 완공되었으며, 그 건축양식과 장식은 기독교적인 유산인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영향을 받아 모스크 내부에는 황금 장식물과 청동 장식이 풍부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디자인은 이슬람 예술과 기독교 예술의 융합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해석됩니다.


블루 모스크의 건축은 기독교의 건축양식과 이슬람의 모스크 건축 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형태로, 특히 모스크 중앙의 청동색의 돔과 푸른색의 터키석 타일장식이 독특한 푸른빛을 연출합니다. 이 색깔이 모스크를 “블루 모스크”라 부르게 된 주된 이유입니다. 이 모스크는 당시의 정치와 종교적인 맥락에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신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간주되었습니다.


블루 모스크의 아름다움은 마치 모스크를 호위하듯 높게 솟아 있는 여섯 개의 첨탑, 미나렛(minaret)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나렛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탑으로, 블루 모스크의 미나렛들은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조용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미나렛의 수는 모스크의 규모와 중요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입니다. 메카의 성지인 모스크와 블루 모스크가 동일한 미나렛 수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블루 모스크가 이슬람 세계에서 높은 존경을 받는 성역임을 의미합니다. 높고 아름다운 첨탑들은 마치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역사를 그들의 예술적인 시각으로 담아낸 것으로 느껴졌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눈에 띄게 빛을 발하고 있는 첨탑을 그저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블루 모스크의 건축양식과 미나렛은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자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미나렛들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르며, 모스크 전체를 둘러싼 정원과 함께 조용한 이슬람 특유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손색이 없습니다. 블루 모스크의 이 미나렛들은 단순히 기도의 시간을 알리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도 높은 예술성을 갖춘 아름다운 것으로 블루 모스크와 함께 여행자들의 발길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하였으며, 이슬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서 온 필자와 필자의 친구들에게 그저 감탄을 자아내게 할 뿐이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블루 모스크 여섯 개의 첨탑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튀르키예어 여섯은 알트 Altı이다. 금은 알튼 altın이라 한다. 1609년, 오스만 제국 술탄 아흐메드 I 세는 건축가이자 자개 기술공인 세데프캬르* 메흐메트 아아(Sedefkâr Mehmet Ağa, 1540~1617)에게 명령하여 블루 모스크의 모든 첨탑을 금으로 만들라 했다.

*[필자주]세데프갸르 Sedefkâr는 자개 기술 노동자에게 부여한 성(性)이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서 돌아온 술탄은 모스크를 찾아와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 첨탑을 금으로 만들라 했는데, 난데없이 왜 여섯 개의 첨탑이 서 있는 건가? 메카와 같은 수의 첨탑을 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상상할 수 없는 돈이 드는데,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물어봤다. 신하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술탄이 여섯 개의 첨탑을 만들라 했다"며, 알튼 altın 대신 알트 Altı로 들었다며 펄쩍펄쩍 뛰며 시침을 뗀 것이다. 결과적으로 첨탑이 여섯 개가 된 이유라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독창적인 모스크를 건설하려는 술탄의 의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었고, 술탄의 의지대로 금으로 첨탑을 치장했을 경우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줄이며 블루 모스크를 더욱 특별한 모스크로 만든 신하들의 재치 있는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당시 네 개의 첨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이 믿지 못할 사고(?)로 블루 모스크는 더욱 특별한 모스크로 건축되었다. 이 높고 아름다운 여섯 개의 미나렛은 지금도 여행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술탄 아흐메드 Ahmed I 세는 메카의 첨탑 건설비를 지원하게 되고 당시 7개의 첨탑이 세워진 메카는 오늘날 전부 아홉 개의 첨탑이 세워져 있다.


블루 모스크의 건축에 사용된 푸른 타일은 17세기 이즈니크 İznik* 타일의 걸작으로, 그 외관과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높은 문화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거대한 돔형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 537년인데 비하여 무려 1,079년이나 늦은 1616년 완공된 모스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 모스크는 비잔틴 시대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아야 소피아 대성당과 나란히 이스탄불에서 볼 수 있는 건축 예술의 진수로 꼽힙니다.


*[필자주] 필자는 튀르키예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여행 일정 막바지에 잠시 부르사에 들리게 되는데, 이즈니크는 아나톨리아 부르사 지방에 위치한 니카이아(그리스어: Νίκαια) 또는 니케아라는 이름으로 더욱 많이 알려진 역사적인 도시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자기와 최고급 타일을 생산하는 도시였다.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이즈니크의 도자기와 타일들이 사용되면서 도자기 산업이 이스탄불로 옮겨 가기 시작하며 도자기의 도시 이즈니크는 쇠퇴하였고 지금은 과거의 이즈니크 타일의 영화를 잃고 작은 소도시로 남아있다.


블루 모스크는 1985년에 "이스탄불의 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포함되어,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 모스크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미적 감각과 예술적 표현을 결합한 결과물로, 끊임없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이스탄불로 불러들이는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무슬림 여행자들의 경우 블루 모스크에 들어가기 위해선 손, 발, 그리고 귀까지 꼼꼼하게 씻어야 합니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는 모스크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무슬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튀르키예는 모스크를 상대적으로 개방한 편입니다. 단, 모스크에 들어가려면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특히 현지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시간에는 출입이 통제되므로 그 시간을 피하는 것이 예의에 맞습니다.


먼저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많이 걷게 되는 관광객들이 모스크에 들어가면 발 냄새가 많이 나게 되어 현지 무슬림들은 좋아할 리가 없다. 필자는 모스크에 입장하기 전 대기할 때 미리 신발을 벗어 바람을 쐬어 가급적 발 냄새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아무튼 여행을 하면서 어디서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싶다.


또한 여성은 모스크에 들어갈 때 머리를 가리기 위해 스카프를 착용해야 합니다. 발목부터 손목,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모두 가려야 모스크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이때 대체용으로 쉽게 머리를 가리는 모자나 후드 모자를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물론 입구에서 스카프와 치마를 빌려주기 때문에 없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지만,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를 여행하다 보면 블루 모스크 외에도 몇 군데의 모스크를 방문할 일정이 더 있을 수 있으니 여성들은 스카프를 한두 장 챙겨 오는 것이 좋을 듯하다.


모스크 경내 벽면을 따라 설치한 이슬람에 대한 안내 문구들을 살펴보다 재밌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세계를 변화시킨 이슬람의 공헌 (Muslim Contributions that changed the World)이란 제목의 안내판에 적힌 몇 가지 상식적인 내용에 관한 것들인데, 몇 가지만 소개한다.


Coffee

The history of coffee is quite interesting. An Arab shepherd named Khalid from Ethiopia noticed that his goats had more energy after eating a special berry. Khalid boiled these berries - and the result was coffee! From Ethiopia coffee spread to Yemen. Here it was used for religious purposes; the Sufis would drink coffee to stay awake all Inight and pray on special occasions. Coltes arrived In Turkey and Makkah in the late 15th century, Haly in 1645, and England in 1650. The Arabic name gahwa became kahve" in Turkish, then "caffé" in Italian.

커피

커피의 역사는 꽤 흥미롭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칼리드라는 아랍의 양치기는 그의 염소들이 특별한 베리를 먹은 후에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칼리드는 이 베리들을 끓였다. 그 결과는 커피였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멘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서 그것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수피족은 밤새 깨어 있기 위해 커피를 마시곤 했다. 콜테스는 15세기 후반 터키와 마카에 도착했고, 할리는 1645년, 영국은 1650년에 도착했다. 아랍어 명칭인 가화는 터키어로 카하브가 되었고, 그다음에는 이탈리아어로 카페가 되었다.


Camera

The first camera was invented by Ibn Al-Haitham in the 10th century. He was a mathematician, a physicist and an astronomer. He understood that light enters the eye-whereas previously people believed, as the ancient Greeks did, that our eyes emit rays which allow us to see. By observing how light came in through a hole in window shutters, Ibn Al-Haitham realised that a smaller hole yielded a better picture. He created the first Camera Obscura, named so from the Arabic word "gamara" meaning a 'dark room’.

카메라

최초의 카메라는 10세기에 Ibn Al-Haitam에 의해 발명되었다. 그는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였다. 그는 빛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빛을 방출한다. Ibn Al-Haitham은 창문 셔터의 구멍을 통해 어떻게 빛이 들어왔는지 관찰함으로써 작은 구멍이 더 나은 그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최초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었는데, 이 이름은 아랍어로 '어두운 방'을 의미하는 "가마라"에서 따온 것이다.


Quilting

Quilting - sewing two pieces of cloth together with a layer in-between, was brought back to Europe by the Crusaders when they noticed the Muslim armies did not wear armour, but instead wore canvas quilted shirts filled with straw. This was quitean improvement over the chafing that resulted from the metal armour the Crusaderswere wearing. Quilted shirts also provided a good deal of insulation and warmth - and hence quilting became very popular in colder regions of Europe like Britain

퀼팅

퀼팅 - 두 개의 천을 겹겹이 꿰매는 것으로, 무슬림 군대가 갑옷을 입지 않고 대신 밀짚(Straw)으로 채워진 캔버스 퀼팅 셔츠를 입는 것을 발견하고 십자군이 유럽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십자군이 입고 있던 금속 갑옷에서 비롯된 찰과상을 줄이는 상당히 개선된 것이었다. 퀼팅 셔츠는 또한 많은 단열과 따뜻함을 제공했다 - 그래서 퀼팅은 영국과 같은 유럽의 더 추운 지역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Soap

Muslims perfected a recipe for soap, which is still in use today. Washing and bathing are important religious obligations before prayer, hence the need to formulate something to aid this. The Ancient Egyptians and the Romans had a form of soap but used it more as pomade. Arab experimenters created a vegetable oil and sodium hydroxide base to which they added fragrant oils e.g. thyme oil. When the Crusaders entered the Arab lands, they earned a reputation of being 'pungent smelling invaders as they did not bathe regularly! In 1759, shampoo was introduced to England by a Muslim entrepreneur who opened Mahomed's Indian Vepour Bathe at the beach in Brighton.

비누

이슬람교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는 비누의 레시피를 완성했다. 세탁과 목욕은 기도 전에 중요한 종교적 의무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돕기 위한 무언가를 공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인들은 비누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포마드로 사용했다. 아랍의 실험자들은 식물성 기름과 수산화나트륨에 백리향 오일 같은 향긋한 오일을 첨가했다. 십자군이 아랍 땅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규칙적으로 목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냄새나는 침략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1759년, 샴푸는 브라이튼의 해변에서 마호메드의 인디언 베푸어 바스를 연 무슬림 사업가에 의해 영국에 소개되었다.


아무튼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하는 관계로 공사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술탄 아흐메트 자미 Sultan Ahmet Camii(튀르키예에서는 이슬람 사원 Mosque를 자미 Camii라 한다.) B 번 출입구(B kapisi)를 통하여 모스크로 입장한다. 블루 모스크 복원공사는 2017년 7월에 시작되었고 첫 번째 두 번째 단계는 22년 4월과 8월에 각각 종료되었으나 모스크의 웅장한 문과 전반적인 복원 작업은 2023년 상반기에 마무리될 예정이라 한다.


B번 출입구 상단 녹색 청동판에 새겨진 아랍어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 아랍어는 까막눈이니 무어라 쓴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종교적인 내용이나 모스크 자체의 역사, 건축 등에 관련된 내용일 것이란 추측을 남겨두고 모스크 내부로 조용히 입장한다.


블루 모스크 내부로 들어가니 복원 공사로 인해 어수선한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2017년에 시작된 이 공사는 원래 2020년에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스크 내부는 임시 구조물과 가설 자재로 가득 차 있어, 모스크를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향해야 하는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흡랍(mihrab)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구역이 공개되지 않아, 블루 모스크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붉은 카펫으로 덮여 있는 바닥과 가설자재 사이로 새겨진 코란의 구절과 아름다운 이슬람 특유의 정교한 문양이 보이는 돔 천장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마치 당시 튀르키예 국내의 어수선한 사정과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이 이곳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블루 모스크의 복원 작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블루 모스크를 기대하며, 현재는 모스크 외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만족해야 했습니다. 미래에는 내부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쉬운 마음에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홈페이지 갤러리에서 블루 모스크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12시간이나 비행하여 온 튀르키예를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다시 이곳을 방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오히려 아쉬움만 더 커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일정 내내 블루 모스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블루 모스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필자와 친구들은 아야소피아 관람을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끝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광장을 가로질러 아야소피아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연히 만난 유쾌한 군밤장수의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 우리를 반긴 순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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