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욕망의 표현
새벽 4시,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소리가 마치 도시의 맥박처럼 새벽을 가르는 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여기는 이스탄불,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지칠 줄 모르는 활기가 넘치고 있다. 호텔 건너편의 상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아직 어둠이 깔린 거리를 환히 비추고 있다.
어제의 장시간 비행과 여섯 시간의 시차를 감안하면,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지는 것은 상당히 피곤할 법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에 벅찬 몸과는 달리 마음은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르겠다.
샤워를 마친 후, 창문을 활짝 열어 이스탄불의 새벽 공기를 방 안으로 들인다. 이 도시의 아침을 제대로 맞이하는 의식처럼 말이다. 이스탄불의 새벽은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마치 도시가 아직 자신만의 숨겨진 감정과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는 듯한 아련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창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상쾌한 도시의 숨결이 그렇다. 거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조용한 소음과 함께, 도시가 서서히 깨어나는 느낌은 역동적인 도시의 절묘한 순간이지 싶다. 거리를 따라 마치 도열하 듯 이어지는 도심의 건물은 아직 졸린 듯 서성이는 그림자를 따라 거리로 나서고, 새벽의 정적은 여전히 도시를 휘감고 있는 시간이다. 그나마 도심이 소음과 번잡함에서 벗어나 차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유일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이른 새벽 거리를 걷는 사람들조차 마치 이 조용한 시간을 느끼며 특별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순간이지 싶다. 마치 도시가 온전히 자신만의 숨을 들이쉬고 내 쉬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동화 속에서 나온 듯한 둥근 지붕의 모스크 위로 희붐한 하늘이 드리워지며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여전히 잠들지 않고 있는 이스탄불의 매력은 참으로 독특하다.
노트북을 열고 어제의 여행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경험이 뒤섞인 기억들이 키보드를 통해 다시 의식 속에서 뛰쳐나와 활자로 되살아난다. 그 순간, 시간과 공간에 기억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소중한 삶의 순간이 마음 깊숙이 새겨진다. 이 도시에서 느끼는 특별한 매력에 감사하며 기록을 마무리한다.
잠시 후 5시가 되자, 탁탁 거리는 키보드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필자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나이를 먹어 밤잠이 없어져서 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친구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침 식사시간까지 1시간 30분가량의 여유가 있어 함께 아침 산책을 나가기로 한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호텔 주변을 걷는다. 깊은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그저 따듯하게 느껴지는 노란색 불빛만이 새어 나오는 이스탄불 외곽의 골목길을 걸으며, 이네들의 삶을 잠시 들여다본다.
그런데, 거리를 오가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어쩌다 한 두 사람 눈에 띄고 거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수 없는, 여전히 정적만이 흐르는 새벽 거리의 풍경이다. 광고를 위하여 밤새 불을 켜 두는 점포 외에는 불을 밝히고 새벽 영업을 하는 점포를 찾기 어렵다. 당연히 인기척이라 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다. 어딜 가나 크고 작은 모스크가 있는 이슬람 나라답게 주택가 가까이에 작은 모스크가 눈에 띈다.
그렇게 1시간 반을 인기척 없는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아침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다.
일행 중 몇몇이 벌써 식당으로 향하고 있다. 사람들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니 꽤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그저 간단하게 차려진 호텔 조식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다. 아침 산책으로 1시간 30분을 걸은 만큼, 친구들과 함께 이것저것 구미에 맞는 음식을 담아와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커피까지 한잔 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호사스러운 여유를 즐긴 후 방으로 올라와 행장을 준비한다.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Constantinople and Istanbul
아침 08시 15분, 대기시간이 보통 1시간가량이라는 아야소피아에 당도한다. 술탄 아흐메드 광장엔 아직 관람시간 전 이어서인지 그리 많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기온은 7℃ 정도로 살짝 한기가 느껴지는 정도의 날씨다.
현재 이곳은 겨울철 우기에 속한다. 우기이긴 하지만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니며, 비가 오다 말고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이다. 겨울이나 되어야 비가 조금 내리는 지중해 기후 특성상 비라 해봐야 우리네의 그런 비가 아닌, 부슬부슬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정도여서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비교적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겨울은 아침저녁으로 몸으로 파고드는 한기를 느낄 정도이고 낮은 봄 날씨처럼 따듯하다. 반면 여름철엔 아열대 기단의 영향을 받아 거의 비가 오지 않는 무덥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그런데 필자가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동안 이곳의 날씨는 전형적인 지중해의 겨울 날씨가 아니었다. 비도 없이 계속 맑은 날이 이어졌고 어디서나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호텔방 또한 온화한 날씨 덕에 난방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날씨가 이어졌다. 이쯤 되면 유럽의 겨울을 에너지 무기화로 삼으려던 푸틴의 계획은 물 건너갔지 싶게 따듯한 지중해의 한낮의 기온은 17~18℃에 이르며 겨울 옷을 입기에 부담스러운 따듯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물론 여행을 하는 필자는 날씨덕을 톡톡히 본 셈이긴 하다.
땅의 95%가 서아시아의 아나톨리아반도에 위치하고, 나머지 5%는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의 동 트라키아에 걸친 나라 튀르키예, 이스라엘처럼 땅은 아시아 대륙에 접해 있으며 유럽으로 편입된 나라 튀르키예, 지정학적인 환경으로 아시아 문화와 유럽 문화가 충돌되며 일정 부분 겹쳐 있는 튀르키예, 특히 이스탄불(Istanbul)은 이 문화적 충돌이 가장 두드러지는 도시 중 하나이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정복할 때까지 천 년 동안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잔티움 Byzantium,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오스만제국의 이스탄불은 모두 오늘날 이스탄불을 이야기한다. 엄청난 제국들이 이 도시에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으니 당연히 역사적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곳, 이스탄불(Istanbul)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등 역사의 전례를 연구하다 문명의 생성, 발전, 쇠퇴의 원리를 깨닫게 되어 ‘도전과 응전’이란 개념을 창안하게 된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4.14~1975.10.22)는 일찍이 전 세계 역사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이 땅을 꼽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땅 이스탄불, 광대한 역사와 문화유적을 자랑하며 다양한 문명이 발생하고 충돌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땅이다. 이 도시는 튀르키예의 경제, 문화, 역사의 중심지로 튀르키예 인구의 약 19%에 해당하는 1,5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식적으로 시리아 난민 400만 명까지 보호하는 인도주의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튀르키예의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로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며 빚어낸 이야기들이 이 도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 필자와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튀르키예의 심장과도 같은 땅 이스탄불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스탄불이 품고 있는 그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체험할 것이다.
고대 로마시대 전차경주장 히포드롬 Hippodrome of Constantinople 술탄 아흐메트 광장 Sultanahmet Meydani
아야소피아 대성당의 개방 시간이 예정보다 조금 뒤로 늦추어져, 시간이 여유로워진 필자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 Sultanahmet Meydani을 먼저 돌아보기로 한다.
히포드롬, 이곳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락물이었던 서커스와 경마 대전차 경기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경마 대전차 경주는 로마인들의 주요한 오락이었고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전차 경기에는 로마 시민들이 열광하며 경기 결과에 돈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대전차 경주에서 관중들은 '니카! 니카!'라고 외치며 경주에 열광했습니다. '니카'는 그리스어로 '이기자', '정복하자'를 의미하며 대전차 경주의 열기 속에서 관중들이 외치던 응원 구호였습니다.
그러나 경주가 고조되고 팬덤이 형성되며 열기가 점점 달아오르며 내기까지 성행하다 보니 취지와는 달리 나라 자체가 피폐해지기 시작하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전차 경주의 기수가 입었던 옷 색깔에 따라 청색당과 녹색당 등의 팬덤은 경기 종료 후 거리에서 난투극까지 벌이고 빈번하게 폭력 사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경기 관람의 순수한 즐거움에서 벗어나 폭력과 혼란을 일으키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이 점차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지요.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대전차 경기를 중단, 폐지하고 폭력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 조치는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며 더 큰 소요사태와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에 황제는 일곱 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집행하며 분쟁과 소요사태를 뿌리 뽑으려 했지만, 이로 인해 서로 대립관계에 있던 녹색당과 청색당 지지자들이 힘을 합쳐 폭동을 일으키며 사태는 더욱 악화됩니다. 여기에 황제의 왕권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로원 등 지배세력까지 가담하며 단순한 폭동이 반란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성난 군중들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관리들을 살해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 상황을 목도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망연자실,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하고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미천한 창녀 신분으로 산전수전을 겪었던 테오도라 황후가 황제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황후는 "황제가 왜 도망을 가느냐, 도망가서 살아봐야 산목숨이 아닌 것을… 치욕적으로 사느니 황제답게 떳떳하게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황제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불만을 직접 들어보겠다는 취지로 폭도들을 한자리에 모은 황제는 술책을 내어 벨리사리우스 등 장군들을 불러 3만여 명의 폭도들을 척살하고 532년에 일어난 폭동을 진압했습니다. 이 사건이 ‘니카의 반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술탄 아흐메트 광장은 역사적으로 로마의 대전차 경기장으로 알려진 히포드롬을 매몰하고 그 위에 세워진 이슬람식 광장으로, 이곳에서는 과거 로마시대 때 관중들이 열광하며 로마의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전차 경기가 벌어졌다. 이 광장은 과거의 흥미로운 사건과 함께 영화 '벤허'에서 소개된 공간으로서, 니카의 반란 사건과도 얽혀 있어 역사와 문화가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곳은 시대와 문명이 교차하는 흥미로운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어 방문객들에게 독특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히포드롬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면서 새롭게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기장은 기존의 전차 경주장을 확장하여 만들어졌으며 길이 450m, 너비 130m의 U자형 트랙으로 건설되었다. 막시무스 원형경기장을 모델로 삼아 엄청난 규모로 건설된 히포드롬은 3만에서 5만, 때로는 1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으로, 당시로선 실로 엄청난 규모의 스포츠 시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7세기 후반에 이슬람 제국이나 랑고바르드 인들의 침입으로 오리엔트나 서방 속주 대부분을 잃게 된다. 결국 로마가 쇠약해지면서 점차 경기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천도한 기념일인 5월 11일이나 황제의 탄생일 등 특별한 날에만 경기가 개최되었고, 11세기 콤네노스 왕조 시대까지 로마 시민들에게 중요한 오락물로 남아있었으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한 후 회복되지 못하고,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면서 히포드롬은 각종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가 점차 방치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에겐 로마의 전차 경주장 히포드롬이 아무런 관심사가 되지 않았으며, 결국 점차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세계관이 알라에 집중되어 있는 이슬람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허허벌판으로 버려져 있던 히포드롬은 결국 메워지고 다른 건축물들이 들어서며 오늘날에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으로 변모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뱀기둥, 벽으로 둘러싸인 오벨리스크 Walled Obelisk (콘스탄틴 오벨리스크)만이 남아 있어 그나마 과거 로마시대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독일 분수대 German Fountain
광장 한편에 위치한 독일 분수대(German Fountain, 튀르키예어: Alman Çeşmesi)는 전망대 스타일의 아름다운 분수로,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이스탄불 방문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900년 독일에서 지어져 조각조각 부품으로 운송되어 현재 위치에서 조립되어 완성되었다.
네오 비잔틴 양식 neo-Byzantine style 건축물인 이 분수대는 팔각형 돔에는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이 있으며 돔 내부는 황금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독일과의 역사적 연결을 상징하며 아름다운 조각과 디자인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분수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독일에 대한 존경과 우호를 상징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독일 분수대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아름다운 디자인과 조각들이 독일의 예술과 문화를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분수의 중앙에는 큰 커다란 돔이 있고, 그 주위를 8개의 독일 주(state)를 나타내는 작은 작품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 작은 작품들은 바바리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부르겐란트, 하노버, 헤센, 바덴, 티린젠의 독일 주를 상징합니다. 분수대의 정상에는 독일의 국가 동물인 독수리와 독일의 국화인 크리스마스 로즈가 조각되어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분수의 네 측면에 8개의 물 뿌리개가 있어, 그릇에 물이 찰 때마다 물 뿌리개에서 물이 나오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물 뿌리개의 디자인과 분수 중앙에 있는 큰 돔, 그리고 작은 작품들이 독일의 문화와 역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독일 분수대는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예술과 독일과의 역사적 연결을 보여주며, 술탄 아흐메트 광장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명소 중 하나입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Obelisk of Theodosius (Turkish: Theodosius Dikilitaş)
영문으로 세워진 안내판을 대강 읽어보니, 오벨리스크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년)에 의해 카르나크 대신전의 일곱 번째 철탑 남쪽에 처음 세워졌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 AD)는 357년 왕위 계승 20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일강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오벨리스크를 운송한다. 390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던 오벨리스크는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AD)에 의하여 이곳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오벨리스크를 옮기기로 한 결정은 자신의 통치를 고대 파라오의 위엄과 연결시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욕망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행위는 당시의 문화적 변화를 더욱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정들은 과거와의 연결을 추구하며 현대 통치와 고대 문명의 상징적인 힘을 엮으려는 본능을 반영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꼽히며, 원래 높이가 30m였는데, 아랫부분은 운송 또는 재건축 과정 중에 손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벨리스크는 높이는 19.59m, 받침대를 포함하면 25.6m이다. 오벨리스크는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다르게 장식되어 있다. 상부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이름과 그의 어머니인 에우도키아와 부인인 에우도크시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벨리스크의 받침대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아치와 코린트식 기둥 사이에 둘러싸인 전차 경주 승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하사하는 모습이 보이며, 행복한 관중, 음악가 및 무용수 등이 부조되어 있다. 큰 손상을 받았던 흔적이 있는 받침대와 오벨리스크에는 수직 틈이 생겼는데, 아마도 지진을 겪은 후 균열이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그 위치가 변경되었는데, 기존에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정전으로 위치하고 있었으나 39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현재의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자리하고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역사와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이스탄불의 중요한 랜드마크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서기 4세기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 Hippodrome of Constantinople, 오늘날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메트 광장 Sultanahmet Meydanı에 재건된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 앞에 서있다는 생각을 하니 천 육백 년 이상의 세월 저 건너편에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한다. 실로 인류 문명의 풍요로운 태피스트리(Tapestries)를 되돌아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뱀 기둥 Serpent Column (Turkish: Yılanlı Sütun 'Serpentine Column')
플라테아 삼각대 Plataean Tripod 또는 델파이 삼각대 Delphi Tripod라고도 하는 뱀 기둥 Serpentine Column으로 잘 알려진 고대 청동 기둥이다. 원래 델포이에 있었던 것을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한다. 기원전 478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페르시아의 그리스 본토 침공에 맞서 동맹을 맺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플라타이아 전투(기원전 479년 8월)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8미터 (26피트) 높이의 청동 기둥의 뱀 머리는 17 세기말까지 현장에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세 개의 얽힌 뱀으로 구성된 이 청동 기둥은 전투에 참가한 31개의 그리스 도시 국가를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로 세 개의 뱀 머리가 지지하는 황금 그릇은 아마도 4차 십자군 전쟁 중에 파괴되거나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오스만 제국의 미니어처엔 도시를 정복한 초기 수십 년 동안 뱀 머리가 손상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대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헤로도토스(Herodotus)는 그의 역사서 "역사"에서 기원전 479년의 트라키아 전쟁과 플라타이아 전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트로이아나(Tropaion)라 불리는 이 기념물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념물은 후에 뱀 기둥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헤로도토스 Herodotus는 플라타이아에서 그리스의 승리를 묘사한 후, 전투에 참여한 스파르타 하층 계급이었던 헬롯이 풍부한 전리품을 수집한 것과 델포이에서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기로 한 그리스의 결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Having brought all the loot together, they set apart a tithe for the god of Delphi. From this was made and dedicated that tripod which rests upon the bronze three-headed serpent, nearest to the altar.”
“모든 전리품을 모은 그들은 델포이의 신을 위해 십일조를 따로 떼어 놓았습니다. 이것으로 제단 가장 가까운 곳에 머리 세 개가 달린 청동 뱀 위에 놓인 황금 그릇을 만들어 헌납하였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erpent_Column ]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Parallel Lives"라는 작품에서 트라키아 전쟁과 뱀 기둥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 동맹군이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기리기 위해 뱀 기둥을 세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 시대의 고고학자이자 여행가인 피날레오(Pausanias)는 "그리스 기용지행기"에서 뱀 기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기둥이 드립시아(Drepana)에서 비잔티온(이스탄불)으로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세워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헌들의 공통적인 기록은 뱀 기둥이 그리스 동맹군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서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종교관으로 이 뱀 기둥을 봤을 때 당연히 우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Mehmed II 세는 정복자로서 전차 경주장에 있는 세 마리의 뱀이 꼬인 기둥에 주목하였을 것이고, 이 교도들의 우상으로 여겨진 뱀 머리를 철퇴로 내려침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 학자들의 주장으론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지 50년에서 100년 사이에 세 마리의 뱀 머리 중 하나의 턱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의 전차 경기장을 메우고 건설한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묻혀 있던 뱀 기둥의 하단엔 비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찰스 토마스 뉴턴의 감독 아래 1855년에 발굴되었다. 15개의 꼬인 부분이 숨겨져 있었고 13번째 꼬인 부분에서 시작하여 3번째 꼬인 부분까지의 비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비문의 해독은 1856 년 C. Frick, 1886 년 Ernst Fabricius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해독되었는데, 당시 전투에 참여한 그리스 도시국가와 참전한 군인들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오벨리스크 Walled Obelisk (Masonry Obelisk (Turkish: Örme Dikilitaş))
오벨리스크 형태의 로마 유적인 ‘벽으로 둘러싸인 오벨리스크 Walled Obelisk’는 고대 전차 경주장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또 다른 오벨리스크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도리안식 오벨리스크(Doric Obelisk) 또는 둘러싸인 오벨리스크(Enclosed Obelisk)로도 알려져 있는데, 다른 오벨리스크들과 달리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세워진 것인지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0세기경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가 오벨리스크를 수리하면서 추가한 비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틴의 오벨리스크(콘스탄틴 디킬리타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오벨리스크의 바닥에는 제작 당시의 상세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중에는 황제 자신이 오벨리스크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공사들을 감독하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약 32m로, 이중 원뿔 형태의 정면과 함께 그 형태가 특이하게 보존되어 있다.
술탄 아흐메트 광장은 과거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유물들이 이곳에 남아있는데, 벽으로 둘러싸인 오벨리스크 역시 그중 하나로서 독특한 디자인과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마르마라 대학교 Marmara University
오벨리스크 뒤로 보이는 건물은 마르마라 대학교 Marmara University의 Haydarpaşa 캠퍼스 건물이다. 이 건물은 건축가 Alexander Vallaury와 Raimondo D' Aronco가 설계한 건물이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는 공립 대학으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교육, 연구,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이다. 다른 튀르키예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마르마라 대학교는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학술 기관 중 하나이다.
1883년 "Hamidiye Ticaret Mekteb-i Âlisi"라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상업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업학교로 개교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명칭과 구조의 변화를 거쳐 1982년에 마르마라 대학교로 변경되었으며 이스탄불의 여러 지역에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다. 주요 캠퍼스는 이스탄불 유럽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학문적 활동과 학생 생활을 지원하는 다양한 시설과 자원을 제공하는 고등 교육기관으로 튀르키예에서 유일하게 튀르키예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아랍어 등 다국어를 구사하는 코스를 제공하는 국제 표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으로 유명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