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그릇에 담긴 이슬람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과 충돌 지점 한가운데 놓인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를 보았다고 해야 하는지 모를 어수선한 관람을 마치고 아야 소피아(영어: Hagia Sophia, 튀르키예어: Ayasofya)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줄 끝을 찾아간다. 오전 09시 40분을 지나는 시각인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한참을 내려와 골목 어귀로 꺾어진 줄 끝을 찾아 선다. 그냥 딱 보기에도 고색창연한 유적의 일부로 보이는 담벼락에 정교하게 짠 터키 카펫을 걸어 판매하고 있는 관광지 주변의 상가 골목까지 대기 줄이 이어진다. 지금은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를 관람하기 위해 모르긴 해도 전 세계 모든 인종이 이른 아침부터 골목을 가득 메웠지 싶다.
사실 우리가 줄을 선 곳은 하기아 소피아 휴렘 술탄 목욕탕 옆의 상가를 낀 골목이다. 일명 아야 소피아 하세키 목욕탕(Ayasofya Haseki Hamamı), 또는 하세키 휴렘 술탄 목욕탕(Haseki Hürrem Sultan Hamamı)은 오스만 제국 역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인 술탄 술레이만(Süleyman)의 배우자인 휴렘(Hürrem Sultan, Roxelana)의 공공사업 후원으로 지어진 16세기 터키식 공중목욕탕, 하맘이다.
록셀라나(Roxelana)는 당시 폴란드 왕국의 동부 지역이었던 루테니아, 현재의 우크라이나 로하틴에서 태어난다. 그런 그녀가 술탄 술레이만의 배우자가 된 것은 그녀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크림 타타르인들에게 노예로 붙잡히면서부터다. 당시 동유럽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 정치적 힘이 교차되는 지역으로, 록셀라나가 태어난 지역은 이와 같은 다양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동유럽에서 벌어진 사회, 정치, 그리고 오스만 제국 내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셈이다.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크리미아 반도를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크리미아 타타르인들과 관계를 맺었고, 타타르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세금을 지불하고 군사적인 도움을 받았다. 당시 크리미아 타타르인들은 동유럽, 특히 현대 우크라이나, 폴란드, 러시아 등 지역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전쟁과 약탈을 수행했다. 때로는 노예를 획득하여 이를 오스만 제국에 제공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유럽 습격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전략적으로 수행되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크리미아 타타르인들을 지원하면서 지역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확보한다.
록셀라나는 크림 타타르인들의 한 부족이었던 노가이(Nogai) 부족의 동유럽 습격 때 노예 거래의 희생자로 붙잡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끌려오게 된다. 노예 신분으로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 들어온 록셀라나는 당시 하렘의 여자들에게서 자식을 낳을 뿐, 결혼을 하지 않는 오스만 제국 술탄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깨고 술탄 술레이만과 결혼하여 법적인 아내가 된다. 오스만 술탄 수석배우자에게 부여하는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황실 배우자 휴렘이 된 록셀라나는 술탄 셀림 2세를 포함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술레이만의 정치적 입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여인이다. 모스크와 꾸란 학교 마드라사(Madrasa), 분수대, 이스탄불 하세키 술탄 단지의 여성 노예시장(Avret Pazary) 근처의 여성병원,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무료급식소 하세키 술탄 이마레트(Haseki Sultan Imaret)를 설립하는 등 공공사업에도 상당 부분 영향력을 끼친 휴렘은 1558년 이스탄불에서 사망한 후 술레이만 모스크단지 내의 영묘에 묻힌다.
아야 소피아의 군밤장수
아야 소피아는 한 번에 관람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하여 입장시키고 있어 좀처럼 줄지 않는 대기 줄은 시간이 갈수록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금세 북새통으로 바뀐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든지 장사가 되는 법이다. 아야 소피아 모스크 앞에는 군밤과 옥수수를 구워 간식거리로 파는 상인들의 손놀림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인다. 이미 한 시간 이상 줄 서서 기다리던 관광객들은 군밤을 사서 까먹으며 무료함을 잠시 떨쳐낸다.
자세히 살펴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손수레 한 대당 세 명 내지 네 명의 사람들이 붙어있다. 손수레 옆에 쭈그려 앉아 한 사람은 계속 군밤에 칼집을 넣고 옥수수 껍질을 까서 굽는 사람에게 넘기고, 또 한 사람은 넘겨받은 군밤과 옥수수를 불에 굽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손님들과 거래하며 판매와 계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네들은 나름 상당히 분업과 협업화가 이루어진 형태의 길거리 상인으로, 그저 손바닥만 한 수레에서 빵도 구워 팔고 커피도 팔며 생계를 꾸리는 이스탄불의 가장들이다. 대신 관광지 프리미엄으로 가격은 그리 싸지 않은 편이다. 360리라를 주고 군 밤 한 봉지를 상인으로부터 건네받는다. 우리네 군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수한 군밤을 까먹으며 모여드는 사람구경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이스탄불 테러와 아야 소피아
조금씩 줄이 줄어들며 우리 일행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테러의 위험 때문인지 술탄 아흐메트 광장 입구의 무장차량 외에도 관광지에 들어갈 때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필자가 들고 다니던 카메라 삼각대도 보관소에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관광객들은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듯 가방이고 핸드폰이고 소지품들을 모두 바구니에 담아 검색대를 통과시키고 나서야 입장이 가능하였다.
1999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이스탄불 폭탄 테러는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필자가 이스탄불을 방문하기 전인 2022년 11월 13일에도 이스티클랄 시내 한복판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되는 등 2016년엔 관광객이 많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지역에서도 테러가 발생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주요 관광지는 물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스탄불 곳곳에 우리의 전투경찰과도 비슷한 튀르키예 군 헌병대인 잔다르마(Jandarma) 무장 대원들이 배치되어 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의 또 다른 풍경이다. 튀르키예 잔다르마는 일반 경찰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임무와 권한을 가진 군사 경찰 부대로 범죄 예방, 공공질서 유지, 국경 보안, 테러 대응 등 군사 및 경찰업무를 수행한다.
테러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테러로 인해 튀르키예 정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음을 이스탄불을 여행하며 곳곳에 대테러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무장군인들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튀르키예 군은 2022년 11월 13일, 같은 해 11월 20일 연이어 발생한 폭탄 테러와 관련하여 쿠르드 무장세력을 배후로 지목하고, 이라크와 시리아 북부 지역의 기지를 공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위권 행사의 일환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복수와 보복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튀르키예 군은 국경 근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튀르키예는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철저히 이루어지는 보안검색을 통과하고 아야 소피아 경내로 입장했다. 튀르키예에서 딱 한 곳을 봐야 한다면 이스탄불을 봐야 하고, 이스탄불에서 딱 한 곳 만을 봐야 한다면 아야 소피아를 봐야 한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도시에서 반드시 체험해야 할 독특한 순간은 바로 아야 소피아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벌어진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스탄불의 보석, 아야 소피아를 우리는 그렇게 마주하였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아야 소피아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오늘날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 제7대 술탄 메흐매트 2세(Mehmet II)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이 정복은 1453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하여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인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졌는데, 이로써 오랜 세월 동안 각 제국의 수도로 존재해 왔던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인 유산을 간직한 채, 튀르키예의 중요한 역사적인 도시로 남아 있다.
과거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벌어진 역사의 큰 물결을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 즉, 페르시아를 상대로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 패권을 잡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약 30여 년 후인 360년 2월 15일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착공한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아야 소피아는 군중들의 폭동으로 완전히 불타 당시의 모습은 알 수 없고, 415년 10월 10일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두 번째 아야 소피아가 재건축된다. 그리고 필자가 전편 글에서 이야기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약 일주일간 벌어진 ‘니카 반란’으로 아야 소피아는 또다시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처럼 아야 소피아는 역사적인 사건들과 함께 불운한 화재를 겪으며, 그 영광과 비애를 함께 간직한 이스탄불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너무 멋지면서도 아름다운 만큼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폭동으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게 된 셈이다. 완전히 전소된 아야 소피아를 보고 망연자실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32년 2월 23일, 이전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신전의 기둥을 다 뽑아서라도 훨씬 더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현재 우리가 보는 아야 소피아를 짓기 위해 트랄레스(현재 튀르키예 아이든, Aydın)의 수학자 안테미우스(Antemius)와 밀레투스(현재 튀르키예 밀레도, Milet) 기하학자이자 엔지니어인 이시도르(Isidore)를 아야 소피아 건축 책임자로 임명하여 5년 10개월 후인 537년 12월 27일에 현재 모습의 화려한 새 대성당을 개관한다.
이처럼 아야 소피아는 고집스러운 역사의 흐름과 불운한 화재 속에서도 끊임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무수한 이야기와 감동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대성당으로 건축되어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좌 대성당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 후 주인이 바뀌고 오스만 제국을 상징하는 모스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으로, 최근엔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며, 늘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아야 소피아를 방문한 우리는 천천히 역사적인 건축물의 내부를 돌아보며, 그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동과 미적인 아름다움을 공유하며 소중한 순간을 만끽했습니다. 오늘날 아야 소피아를 둘러싼 동서 간의 갈등을 감안한다면, 아직 끝나지 않은 아야 소피아의 여정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기독교적인 요소와 이슬람 장식들이 혼재되어 있는 아야 소피아의 내부를 둘러보며 떠 오른 필자의 이 생각은 결코 우연이 아닌, 심란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야 소피아는 시대와 문화를 넘어선 역사의 흐름을 지닌 독특한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머문 시간은 마치 역사의 책장을 넘기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현재의 아야 소피아가 진행 중인 변화와 동서 간의 갈등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미래를 향해 여전히 알 수 없는 여정을 떠날 것이며, 그 여정이 어떠한 모습을 띄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 공인, 그리고 아야 소피아
여기서 잠시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처음부터 로마가 기독교 성당을 지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성당이라기보다는 집회소와 같은 형태의 장소에서 예배가 이루어졌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것은 313년 콘스탄티니우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Milan Edict)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기독교 박해가 극심했었다.
초기 기독교, 즉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AD 30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면서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의 초대교회(Apostolic Church) 시대에는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던 시절로, 일치된 신학도 없었고 확립된 성경도 없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예수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 이후, 당시로서는 새로운 종교였던 기독교가 급속도로 전파되며,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사자의 밥이 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무려 300년 동안 이루어진다. 엄밀히 따져보면 밀라노 칙령은 극심했던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던 사건으로, 빌라도는 로마 제국의 유대 지배자로서 유대인들의 성절* 기간인 유월절 중 예수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 제국에 반역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의 최를 찾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은 유대인들의 반란 우려와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려운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이는 예수의 죽음이 로마의 정치적인 고민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압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잡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필자주] "Pesach" 또는 "Pesah"로 알려진 유월절(Undleavened Bread Festival)을 포함한 유대교의 여러 축제
아무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이후에 또 다른 종교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예수는 자신의 설교와 행적을 글로 남긴 적이 없었다. 즉 초기 기독교는 교단과 교리가 뚜렷한 시절이 아니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를 갖고 격렬한 논쟁이 빚어지고 종파가 생겨나며 이단 분쟁이 일어난다. 성경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기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력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기독교 교리를 통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다. 이 공의회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모여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는데, 성 니콜라스 대주교는 당시에 이 공의회에 참여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정통 기독교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잘 알려진 신앙 고백문인 니키아 신경이 채택되었다. 이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형성한다는 교리를 확립하고 이단을 단죄하는 종교적 선언이 이루어져 기독교 신자들에게 정신적 안정과 통일된 신앙의 기반을 제공하기에 이릅니다.
기독교를 통해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4년에서 330년 사이에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했습니다. 이로써 로마의 중심지가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발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하고 흔들렸던 당시 로마 제국을 바로잡기 위해, 로마의 수도를 새로운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새로운 수도에 기독교 성당도 건설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마그나 에클레시아(Magna Ecclesia, 위대한 교회)와 아야 아이린(Hagia Irene) 교회는 당시에 지어진 건물 중 일부로, 첫 번째 아야 소피아가 완공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대성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적인 로마 제국의 건축물 아야 소피아의 운명
다시 미인박명, 아야 소피아 이야기로 돌아가서, 로마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에는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가 크게 발전한다. 아야 소피아는 동방정교회 대성당으로 세워졌으며, 537년 건축 후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동방정교회의 대성당이었던 아야 소피아는 네 개의 첨탑 (Minaret)을 추가하여 1931년 까지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며, 1935년엔 박물관으로 개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2020년 7월 10일 아야 소피아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뀌어 현재까지 공식 명칭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The Hagia Sophia Grand Mosque)'로 사용되고 있다.
아야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적인 로마 제국의 건축물로, 세계 4대 성당으로 꼽히는 런던의 성 바오로 대성당이나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과 더불어 놀라운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아야 소피아는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적인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인 모스크로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필자가 느끼기에 참으로 독특한 신앙 공간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독특한 아야 소피아의 운명은 아야 소피아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또한, 오늘날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와 긴장으로 야기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안타까운 충돌과 갈등을 대변하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아야 소피아의 운명은 오늘날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과 동서 간의 충돌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야 소피아를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현재의 아야 소피아의 운명과 모습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37년 10월, 세계 최초 돔 형태의 건축물로 완성된 아야 소피아를 보았을 때,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부활 후 재림을 약속하고 하늘나라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지은 이 돔 형태의 아야 소피아를 바라보며, 자신의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했다고, "솔로몬, 나는 당신을 능가했습니다. Salomon, I have surpassed thee." 라며 감격과 경탄의 감정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당시가 537년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병존했던 삼국시대 때의 일입니다. 1520년에 세비야 대성당이 완공될 때까지 거의 천년 동안 아야 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당시 동방 정교회의 종교적, 영적 중심지였던 아야 소피아 내부는 방마다 구전으로 내려온 성경의 이야기와 종교적 주제를 다룬 아름다운 모자이크 및 예술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이 모자이크는 창세기부터 66권의 성경을 담은 예술적인 작품으로 장식되었습니다. 현재도 남아있는 그림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내부는 그 당시의 예술과 종교적인 표현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하지만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모스크로 개조되면서 이전의 기독교적인 내용들이 많은 부분 덮이고 변경되었습니다.
필자가 방문한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는 회반죽을 걷어내고 일부를 복원한 모습과 아랍어 캘라그라피와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추가된 모습이었고 바닥은 녹색 카펫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2층 3층의 작은 방들은 출입이 전부 통제되어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몇 년 전까지 만해도 관람할 수 있었다는 아야 소피아의 특징적인 장식은 거의 보지를 못하였고, 중앙 돔 쿠페(Cupola), 중앙 돔을 감싸는 세 개의 큰 벽 이브닝(Eyvān), 모스크로 개조되고 추가된 모습만 보고 온 셈이지요. 아쉬움이 상당히 큰 순간이었지만, 다양한 문화적 변화와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변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여전히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기독교의 동서 분열과 아야 소피아
동방정교회는 1세기 초대 교회부터 로마 제국 때 형성된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등 5개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여 급속도로 성장한다. 그리고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세계 공의회를 통하여 교리와 전례를 정비하고 제정하여 완성함으로써 하나의 교회로 유지된다. 동방정교회는 이 다섯 총대주교좌가 동등하다고 여겼다. 이에 반해 로마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수위권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역사적으로 로마 교회는 기독교 공인 이후 실질적 우위를 지닌 적이 없으며, 로마 교회를 제외하고 4개 지역 교회들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행한 공의회의 결과를 따르며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좌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다.
그러던 중 8세기 성상숭배 금지령 문제와, 9세기 후엽 교황 니콜라오의 필리오케(Filioque) 교리를 이단으로 간주해 교황을 폐위하려는 계획으로 빚어진 포티우스(Photius) 분쟁에 따른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좌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결정으로 11세기 로마 교회의 이탈이 가속화된다. 결정적인 동방정교회와 로마 교회의 분열은 남 이탈리아에 진출한 노르만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비잔티움에 노르만 정복군을 요청하게 되고, 비잔티움 측은 이에 호응하여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완강히 반대를 하며, 로마의 전례를 ‘유대교적’이라 비판하며 교황을 ‘아버지’가 아닌 ‘형제’로 묘사한다. 이에 교황 레오 9세는 반 동방정교회 성향이 강한 추기경 홈베르트와 다른 두 명의 추기경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고 서로의 오만한 태도와 양측의 교리를 문제 삼으며 협의는 비난으로 이어지다 결국 1054년 7월 16일 로마 교회의 추기경 홈베르트는 동방정교회에 대한 파문장을 아야 소피아 제단에 올려놓고 신발의 먼지를 터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동방정교회를 자극하기에 이른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로마 시민들을 부추기며 파문장을 불태우고 홈베르트 등 세 명의 교황사절단을 역으로 파문해 버리며 교단에서 교황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이로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의 성직자를 파문하고 서로를 파문하는 기독교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로마 가톨릭 교황의 사절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미카엘 케롤라리오스가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만난 취지는, 같은 종교인데, 파가 다를 뿐인데 잘해보자는 취지였지만,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다 결국은 로마 가톨릭은 동방정교회를 동방정교회는 로마 가톨릭을 서로 파문하는 미카엘 케롤라리오스 사건 이후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형식적으로 그 파문을 철회할 때까지 거의 900년 동안 계속된다. 그 동서분열의 중심에 아야 소피아가 있었다.
그러던 중 1071년 동로마 제국과 알프 아르슬란이 지휘하는 셀주크 제국 간 만지케르트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는 적에게 포로로 잡힌다. 로마의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것은 3세기 발레리아누스 이래 처음 있는 일로 포로로 잡힌 것도 엄청난 치욕인데, 우리 역사 중 조선 시대 때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항복의 예를 올리며 땅바닥에 머리를 찢으며 조아렸던 것처럼 심한 모욕을 당한다. 이 전투로 투르크족에 대한 로마 제국의 저항은 완벽하게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황제 로마노스 4세는 서로를 파문하며 분열하였던 로마 교황에게 원군을 청하기에 이른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기독교 동서 분열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아야 소피아 약탈
제4차 십자군(1202년~1204년)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의 투르크족 팽창에 대한 경고와 원군 요청을 감안하여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기획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중심으로 플랑드르, 발루아, 신성 로마 제국 및 베네치아 공화국이 원정에 참가한 로마 기독교의 십자군이었다.
그런데 당초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원정 목표였던 이슬람 세력의 축출보다는 세속적이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원정 성격이 더 강했던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을 목표로 변경하면서 1204년 동방정교회 국가인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도시를 유린하며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방화를 저지른다. 제4차 십자군의 이 약탈과 파괴는 일반 건물의 약탈에서 동방정교회 성당의 제단 장식, 십자가와 성상, 성인들의 유해 같은 성물까지 약탈하기에 이르고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을 낳았으며 기독교 동서 분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생겨난 뿌리 깊은 동방정교회의 반(反) 로마 감정과 15세기 피렌체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동서 교회의 합의를 동방정교회 평신도들이 격렬히 거부하며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극대화되었고, 마침내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1453년 동로마 제국 패망과 함께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 치하로 넘어가면서, 마침내 영구적으로 동서 교회가 나뉘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1095년 예루살렘으로 출병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은 1272년 마지막 제8차 십자군전쟁까지 약 180여 년간, 종교적 신앙적 목적과 세속적이고 경제적 이득을 목표로 이루어진 원정으로 많은 부작용이 발생되기도 하였지만, 한때 이슬람 세력은 약화되는 듯하였다. 그러한 십자군 원정 중 가장 최악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 102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이후 동방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쇠락과 함께하며, 급기야 1453년 5월 29일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투르크 족이 쳐들어와 정복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최후를 맞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이 모든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역시 아야 소피아가 있었다.
아야 소피아의 수난, 동방정교회 대성당에서 이슬람 모스크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매트 2세는 아야 소피아에서 금요일 기도와 쿠트바(khutbah, sermon, 이슬람교의 설교)를 수행하여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공식 사용한다. 이는 동방정교회의 성당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의미도 있지만, 기독교 세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메흐매트 2세는 어떤 형태로든 동물문양이나 그림을 모스크 장식에 사용할 수 없는, 동물을 우상으로 여기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아야 소피아 대성당에 그려진 동물 그림 등을 파괴하라 명령한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치세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건 아니지 싶어 파괴를 중지하고 회반죽을 개어 우상으로 여긴 동물 그림들을 덮어 모스크로 개조한다. 이후 첨탑이 추가되고 바닥은 카펫으로 덮여 19세기까지 다시 볼 수 없었으며 예수, 마리아 및 다양한 비잔틴 황제를 묘사한 나르텍스와 모자이크는 1930년 터키 공화국이 백색 도료와 석고를 걷어낼 때까지 덮여 있어야 하는 비운을 맞는다.
여전히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과 충돌 지점 한가운데 놓인 아야 소피아와 튀르키예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한다. 이 전쟁에서 독일이 패하며 전범국가인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중동의 영토 대부분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넘어갔고, 에게해의 수많은 섬들은 그리스에 양도된다. 그 이후, 그리스의 침공으로 상당히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여 한때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1922년 케말 파샤(장군)의 지휘 아래 그리스 군을 앙카라에서 격파하고, 이어서 도주하는 그리스 군을 이스탄불에서 또 대파함으로써 그리스 영토가 된 일부까지 실질적으로 회복한다. 당시 확보한 영토가 로잔 조약으로 확정되어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로 굳어진다. 튀르키예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의 지도하에 혼란스러운 국정을 다잡고 술탄제가 폐지되며,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된 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대통령에 의해 터키공화국이 수립된다.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에 대한 서방세계의 강한 압력이 계속되었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은 1935년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2014년엔 330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아야 소피아는 이렇게 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가톨릭 성당도 아니고 모스크도 아닌 상태로, 서방 세계의 비위도 맞추고 튀르키예 공화국 국익에도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해법으로 운영이 되었다.
그런데, 돌연 2018년부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되돌려 놓는 발언을 쏟아낸다. 그리고 2020년 튀르키예 정부는 아야 소피아에서 이슬람 기도로 콘스탄티노플 정복 567주년을 기념하며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는 것을 공식화하여 분란을 자초한다. 같은 해 6월 25일, 국제 비잔틴 연구 협회 회장인 존 할던(John Haldon)은 에르도안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유지하는 것의 가치를 고려하라’고 강력히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후 2022년 공식 국가 명칭을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공식화한 튀르키예 공화국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사용하면서 빚어진 서방세계의 압력과 경제제재 등에 시달리며 공식적인 인플레이션 90%를 넘나드는 경제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는 것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을 실망시킬 것", 또한 "동양이 서양과 포용되는 중요한 중심지"인 아야 소피아가 모스크로 전환될 경우 "이 두 세계를 분열시킬 것", "아야 소피아에 대한 위협은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위협"이라는 비난과 경고가 이어지고 있으며, 유네스코는 "사전 논의 없이 이루어진 전환에 대해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하는 등 "유네스코와의 사전 논의 없이 유적지에 대한 물리적 접근, 건물 구조, 부지의 이동 가능한 재산 또는 부지 관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행 조치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튀르키예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세계 350개 교단, 5억에 달하는 기독교인과 그리스와 키프로스는 터키에 대한 EU의 제재를 촉구하는 등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방 세계의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모스크로의 전환이 야기한 국제적인 갈등은 생각보다 심각했으며,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튀르키예 정부의 조치를 지지하는 북키프로스, 이란, 아랍 마그레브 연합, 무슬림 형제단,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운동,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이슬람권의 국가들과 단체들은 튀르키예를 옹호하며 나서고 있어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로 양분되는 갈등으로 번지는 복잡한 양상 한가운데에 또다시 아야 소피아가 놓여 있는 모양새이다.
아야 소피아를 바라보며, 필자는 ‘기독교 그릇에 담긴 이슬람’이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아야 소피아의 건축 구조는 전형적인 로마 교회의 양식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 내부에 담긴 것은 명백히 전형적인 이슬람이었다. 과거의 그리스의 비잔티움과 십자군 전쟁,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이 그러했듯이 여전히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쟁과 갈등이 충돌되는 지점 한가운데에 아야 소피아가 있었다. (계속)